김종직 문하에서 수학 훈구파들 귀족화 비판 조의제문 사초로 멸족

▲ 김진태 전 검찰총장
一馬遲遲渡漢津 (일마지지도한진·필마로 느릿느릿 한강 나루를 건너는데)
落花隨水柳含嚬 (낙화수수류함빈·꽃잎은 물결 따라 흐르고 버들은 찡그린 듯하네)
微臣此去歸何日 (미신차거귀하일·미미한 신하 이제 가면 언제 돌아오게 될까)
回首終南已暮春 (회수종남이모춘·종남산 돌아보니 봄이 이미 저무네)

이 시는 김일손이 32세 되던 해, 낙향하면서 지은 것이다. 벼슬을 그만두고 필마로 한강을 건너는데 아직도 벼슬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어서인지 걸음이 느리기만 하다. 다시 돌아오고 싶지만 봄이 이미 저물어 가고 있으니 그게 가능할까.


조선 전기의 문인 탁영(濯纓)김일손은 김종직의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생원·진사시, 식년 문과 등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하여 권지부정자, 이조정랑, 춘추관 기사관 등을 지냈다.

주로 언관(言官)이나 사관(史官)으로 근무하면서 유자광(柳子光), 이극돈(李克墩) 등 훈구파 학자들의 부패와 비행을 고발하고 권세를 가진 채 귀족화됨을 비판했으며, 사림파의 중앙 정계 진출을 적극 도왔다.

춘추관 기사관으로 있을 때 김종직이 세조찬위(世祖纂位·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빼앗은 일)의 부당함을 풍자하여 지은 ‘조의제문’을 사초에 실었는데 무오사화 때 이 일로 그는 물론 여러 선비들이 희생되었다. 그는 당시 멸족을 당하여 그 이후 김해 김씨(삼현파)는 씨가 말라 더 이상 과거 등용자가 없었다는 말이 나돌기까지 했다.

김일손은 소인배를 우습게 보는 강직한 성품에 자신을 ‘높이 자처하고 남을 칭찬하는 일이 적었다(亢少許可)’고 한다. 더 나아가 인물을 평가하고 국사를 논함이 청천백일 (靑天白日) 같았지만 지나치게 과감하고 직설적이었다. 심지어 그의 동료였던 정광필, 김굉필, 김안국 등이 그의 지나친 과격성을 만류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자신이야 천성이 곧고 맑았지만 그렇지 못하지만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과 어떻게 공동체를 이루어 나갈 것인가에 대하여 그의 희생은 많은 숙제를 남겼다. 그는 시 ‘만년송(萬年松)’에서 ‘우습다. 권세가의 홰나무와 버드나무는 황혼의 가을바람에 흔들려 떨어지네(饒笑朱門槐柳樹 秋風搖落日黃曛)’라고 노래했지만 그가 먼저 떨어졌으니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곤혹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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