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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가] 32. 안동 내앞마을 의성김씨 종택

학행 뛰어난 인재 다수 배출…'오자등과택'으로 불려

오종명 기자 ojm2171@kyongbuk.com 등록일 2016년10월23일 19시58분  
△안동 내앞마을 의성김씨 대종가

대종가로 불리는 의성김씨 종택은 안동 시내에서 동쪽으로 반변천을 따라 12Km를 올라가다 보면 34번국도 좌측에 고풍어린 기와집들이 즐비하게 자리 잡고 있다. 바로 500여 년의 역사를 지닌 의성김씨 집성촌이다.

종택이 위치한 천전리는 반변천의 앞에 있다고 해서 ‘내앞’으로 불린다.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내앞 마을은 의성김씨 청계파의 동성마을로 유명한 반촌마을이다.

보물 1221호 청계 김진 영정
이 마을 가운데에 청계(靑溪) 김진(金璡, 1500∼1580)을 중시조로 모시는 의성김씨 내앞 종택(청계종택)이 위치한다. 이 종택은 조선 선비의 강렬한 기개가 전해오는 집이다.

이 집안에서 청계 김진의 아들 5형제가 모두 과거에 급제했다 하여 ‘오자등과택(五子登科宅)’으로도 불린다. 약봉 김극일, 귀봉 김수일, 운암 김명일, 학봉 김성일, 남악 김복일 등 5형제는 내 앞, 신당, 금계, 예천 등지에 종택과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5개 파에서 문과급제 24명, 생원 진사 64명을 배출했다.

사빈서원
청계 김진과 그의 후손들이 남긴 종택도 무려 6곳이나 된다. 조선시대 내노라는 명문가들도 지금은 종택이 없어진 것과는 대조적이다. 지역사회 신망을 얻지 못한 양반가와는 달리 의성 김씨가의 종택들은 모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이는 청계가문이 지역민에게 존경받았음을 의미한다.

청계 이후 근세까지 학문적 전통과 실천궁행하는 가학적 풍모는 굳건히 지켜왔다. 근세에 건국 유공 훈포장자만도 37여 명에 이른다. 이는 수 백년 이어 내려온 이 집안의 가학적 전통의 발로인 것이다.


△오룡지가(五龍之家)와 청계 김진

조선 중기의 학자인 김진의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영중(瑩仲), 호는 청계(靑溪)다.

그는 청계 가문을 퇴계 가문과 쌍벽을 이룰 만큼 500년 명문가 반석 위에 올려 놓은 인물이다. 다섯 아들이 모두 과거에 합격한 것도 드문 일이지만, 그 다섯 아들 모두가 학행이 뛰어난 선비로서 각각 일가를 이룬 배경에는 청계 김진이 있었다.

청계는 자신의 성취보다는 자녀교육에 심혈을 기울였다. 청계가 26세에 과거 1차 시험인 사마시에 합격했지만, 돌연 대과(2차시)를 포기한다. 여기엔 숨은 일화가 문중에 전해진다.

대과를 위해 서울로 가던 김진은 문경 조령을 넘던 중 한 관상가를 만난다. 관상가로 부터 “살아서 참판이 되는 것보다는 증판서가 후일을 위해 유리할 것”이라는 얘기를 듣고, 대과를 포기하고 자식교육에 매진한다. 증판서는 아들이 과거에 합격하고 고위직에 오를 경우 그 아비에게 내려지는 벼슬이다.

청계는 자녀교육에 관해 유별나게 관심을 기울인 특별한 아버지였다. 넷째 아들 학봉이 작성한 ‘청계 행장’에는 “큰형이 과거에 급제하고 어머니께서 돌아가셨을 때, 자녀가 모두 8남매나 되었는데, 대부분 어린 아이 이거나 강보 속에 있었다.

한밤중에 강보 속 어린아이가 어미젖을 찾는데 그 소리가 아주 애처로웠다. 이에 아버지께서는 자신의 젖을 물려주었는데, 비록 젖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아이는 젖꼭지를 빨면서 울음을 그쳤다. 아버지께서 이 일을 말씀하실 적마다 좌우에서 듣는 사람 중 울지 않는 이가 없었다”고 전한다.

청계는 평소 다섯 아들에게 “사람이 차라리 곧은 도(道)를 지키다 죽을지언정 무도하게 사는 것은 옳지 않으니, 너희들이 군자가 되어 죽는다면 나는 그것을 살아 있는 것으로 여길 것이고, 만약 소인으로 산다면 그것을 죽은 것으로 볼 것이다.”라고 훈계했다.

또한 그는 “재산은 300석 이상 갖지 말고, 벼슬은 당상관 이상 오르지 말 것”을 주문하며 유훈으로도 남겼다. 분수를 지키며 청빈한 삶을 살도록 가르쳤던 것이다.

훗날 청계는 많은 자녀를 모두 훌륭하게 키웠고, 관상가의 예언대로 본인은 벼슬을 하지 못했으나 죽어서 자식 덕분에 판서(이조판서)가 되는 영광을 누렸다.

종택 내 수령300년된 회화나무
△독립운동의 산실 내앞마을

내앞마을은 우리 근대사의 곡절 많은 소용돌이를 겪어 왔다. 안동지역에서 문중 단위로 일제에 저항한 마을이 여럿 있으나 그중 학봉 김성일의 소종택을 이어온 금계마을과 의성 김씨 내앞마을을 빼놓을 수 없다.

내앞 사람들의 의병과 독립운동에 관한 이야기는 별도의 책 한 권이 필요할 정도라 한다. 내앞 문중에서 모두 36명이 독립유공자로 포상을 받았다. 내앞 문중은 식민통치에 협조해 기득권을 보전하는 길이 아니라 ‘의(義)’의 실천으로서 ‘항일의 길’을 선택했던 것이다.

갑오년(1894)과 을미년(1895)의 의병항쟁을 비롯, 협동학교 개교(1907), 문중 단위의 집단 망명(1910~1911) 등 이 마을 사람들은 나라를 위해 목숨마저 마지 않았다. 1907년 의성 김씨 문중 서당인 가산서당에서 출발한 협동학교는 3·1운동 이후 강제 폐교될 때까지 독립투사의 산실이었다.

내앞마을에는 경북독립운동기념관 공사가 한창이었다. 독립운동의 성지로 일컬어지는 이 마을에 들어 서니, “차라리 곧은 도리를 지키다 죽을지언정 도리를 굽혀서 살지 말라”는 청계의 가르침이 새삼 떠올랐다.

의성김씨 대종가에는 청계 16세 종손 김창균씨(1953년생·전 포스텍 교수) 내외가 지키고 있다. 종택에는 솟을대문도 없고, 당호도 특별히 없었다. 오히려 청계 선생의 검소함과 청빈함을 수백 년 후손들에게 말해주고 있는 듯 했다.

청계는 유언으로 제전(祭田)을 영원히 분배하지 못하도록 했다. 상사(喪事)의 도구는 모두 검소하게 마련할 것이며, 곤궁한 자녀들에게는 제사에 유과(油果)와 약과(藥果) 등을 쓰지 못하게 했다. 또한 여러 자손들에게 종손을 공경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청계 선생과 그의 다섯 아들의 위패는 사빈서원에 모셔졌다.

내앞마을에 있는 김동삼 생가터
내앞마을에 있는 백하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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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종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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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동 담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