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선이 놀러왔다' 전설처럼 아름다운 자태 천혜의 승지

반암마을
정감록 십승지(十勝地) 중에 하나인 전라도 호암(壺岩)이 전라북도 부안군 변산이라는 주장과 고창군 아산(반암)이라는 주장이 서로 용호상박 중이다.

부안군은 변산면 중계리에 십승지 표석을 해놓고 있고, 십승지 지역 읍면장 단체인 ‘조선십승지 읍.면장협의회’도 변산면이 가입돼 있다. 대통령 직속 지역발전위원회와 농림축산식품부가 지난 2014년 3월 ‘한국천하명당 십승지 친환경농산물 공동마케팅과 히스토리 투어(History Tour) 사업’을 공동으로 선정했다.

항구로 유명한 곰소항 격포항 등 풍성한 바다, 넓은 들판, 변산이라는 명산이 있어 우리 국민들 사이에서는 변산반도로 널리 알려졌다. ‘생거부안(生居扶安)’이라 불릴 만큼 산과 바다 들이 잘 조합된 곳이다. 곰소의 소금과 젖갈, 그리고 격포항의 수문장 채석강의 절경으로 보면 부안(扶安)은 지명 그대로 편안함을 돕는 곳이다.

반암마을의 인천강.
우리 나라 십승지는 거의가 백두대간 자락에 안겨 있지만, 백두대간에서 벗어난 곳이 변산 동쪽 호암(壺岩)이다. 변산은 조그만 야산과 논밭을 지나는 평지돌출형 산이다. 고창의 방장산(方丈山)과 고부의 두승산(瀛洲山)을 합쳐 전라도의 삼신산으로 여긴다. 또한 경관이 일품이어서 전북도내에서는 ‘춘변산(春邊山)추내장(秋內藏)’이라 하여 ‘봄꽃 경치는 변산이오 가을단풍은 내장산’ 을 꼽을 정도다.

21일 십승지 취재진을 맞이한 변산면 총무팀장은 중계리를 안내했다. 그러나 그곳은 승지라는 이름답게 사람 살 만한 곳으로 좋은 곳인가하는 의문이 들었다. 십승지 연구에 평생을 바쳐온 이희성 풍수지리가도 "부안의 내변산은 전란시 피난지이지 사람들이 살만한 곳은 아니다. 과거 전란시에도 시인묵객들이 잠시 몽을 숨기는 곳"이라고 말했다.

부안이라면 변산면 중계리보다는 보안면 우반동(우동리)이 오히려 승지로서 요건을 갖추고 있다. 우동 초입에서 북쪽을 올려다보면 옥녀봉(玉女峰)이 보이고, 멀리 산 끝자락 아래로 굴 바위가 보이는데, 굴안에서 입구를 보면 마치 병을 세워 논 모양이라 하여 호암(壺岩, 병바위)이라 한다는 것이다. 이곳은 삼면의 높은 산록과 앞쪽의 천마사가 앞을 막아주면서 천혜의 삼태기형국이다. 이곳은 허균과 유형원이 한 때 낙향했다.

허균은 해운판관이 되었을 때 처음 부안을 찾았다가 그 뒤 공주목사에서 파직된 이후 부안을 다시 찾아와 우반동에 와 정사암(靜思庵)에서 머무르다 한양으로 돌아갔다. 전라도 함열에서의 유배가 풀리자 1611년 11월 우반동으로 와서 1613년까지 이곳에 살며 <홍길동전>을 지은 곳으로 추정된다.

병바위
1653년, 우반동에 32살의 젊은 중농주의자 반계 유형원(1622~1673)이 찾아온다. 중농주의를 바탕에 둔 기록이 영조 때 발간된 <반계수록>. 반계의 집은 사라졌지만 이곳에 반계서당을 다시 지어놓았다. 우동리에선 줄포만 너머 선운산이 희미하게 보인다. 유형원은 지금의 우동리 기슭에 터를 잡고 살면서 우반의 반(磻)을 따서 호가 반계(磻溪)다.

최근 부안군의 인근인 고창군 아산면(면장 박호인) 반암마을이 정감록이 말하는 십승지 호암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고창군도 십승지 지역 마케팅에 적극 나서고 있다. 고창군은 이미 2012년 8월 ‘전국 십승지 조사 연구용역’을 발표하고 정감록의 호암이 부안군 변산면이 아닌 고창군 아산면 호암(壺岩) 아래 반암마을이라고 주장했다. 고창군 아산면 호암 아래 반암마을이라는 설이 새로운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이다.

전북소설가협회장이자 전주대 평생대학 풍수지리 주임교수 김상휘 박사는 "조선 태종 때까지는 고창 아산 반암(흥덕현)이 부안현이었으나 그 후 흥덕현을 폐하는 과정에서 지명 변천사를 정확히 추적하지 못한 오류다. 행정구역 변경 이전 태종 때(1414) 보안을 부령에 합했다가 1415년에 분리 후 그해 8월 다시 합했다. 이후 태종16년 7월에 갈라놓았다가 12월에 다시 부안으로 합했다가, 그 다음해 흥덕진을 없애고 본 현에 이속시켜 부안진이라고 했다. 이후 1914년 군ㆍ면 폐합 때 다시 흥덕진(부안 일부)을 이웃 흥덕군과 무장군에 편입 고창군 아산면으로 옮겨진 과정에서 지명의 변천사를 확인하지 않은 실수다. 호암이라고 하는 지명은 일명 병바위, 즉 병호(壺) 바위암(巖)으로 불리며 반암(호암)마을을 지켜주고 있는 인천강 옆에 서있는 거대 괴암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에 앞서 육당 최남선의 ‘심춘순례’에 선운산과 고창 아산 반암마을의 존좌바위, 소반바위, 병바위(호암)를 소개하면서 이곳을 산여수(山與水)가 두르고 흐른다며 십승지라고 기록한 자료가 있다. 부안군 변산면에 호암이라는 지명도 없다는 것이다.

반암 마을은 멀리 소요산과 선운산이 보이고 인천강이 바깥으로 감싸고 있다. 김 박사는 전라도 8대명당중에 세 곳이 반암마을에 있다고 말했다. 인물도 숱하게 났다. 김성수 부통령, 김상협 국무총리, 진의종 국무총리가 이 마을과 내외(內外)의 연을 가지고 있다. 연희전문의 경제사학자로 좌파 경제이론가이자 해방정국의 남로당의 전신인 조선신민당을 이끈 백남운(白南雲)도 이 마을 출신. 반암마을은 신선이 놀러왔다는 전설이 있을 정도로 천혜의 승지다. 마을을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차일봉 각시봉 우산봉 안장바위 마명 재갈등이 저마다 전설을 안고 있다. 김상휘 박사가 구성한 글이다.

"연잎처럼 예쁘게 처진 하얀 차일(차일봉)이 새 신부를 맞기 위해 펄럭이는 봄바람을 안아내고 있다. 예쁜신부를 태운 가마가 탑정에서 반암으로 넘어오는 큰재 정상에서 잠시 머물자 연지곤지 찍은 새색시가 조심스럽게 마을을 향해 내려다 보고 있다(각시봉). 마동은 한손에 말고삐를 매어 잡고, 다른 손엔 풀피리 불어가며 오늘만큼은 일손을 놓아버린 누렁소가 되새김질하는 우산봉(臥牛穴.호암뒷산)을 지나간다. 마동은 말안장을 훌러덩 벗겨내고(안장바위), 말고삐를 느슨하게 탑정에 매어놓고 여물이 가득한 구수통(탑정 구수댕이)까지 밀어 넣어준다. 교좌바위에서 내려앉은 새색시(각시봉)가 반암마을로 예쁘게 걸어 들어오니 분위기는 극도에 다다른다. 속세와 어우러진 신선님을 보고 애가 탄 애마가 (신선님 술을 조금만 드시지요) 밤 하늘을 보며 목 놓아 울어댑니다(마명馬鳴).옥녀 자태에 잠시 넋을 잃었던 마동은 말 울음소리가 신선님이 올려놓은 분위기를 깰까 봐 후다닥 말 주둥이에 자갈을 물려 버린다(재갈등). 질펀한 취기에 녹아난 신선님도 이제 그 자리에서 스르르 누워버렸으니 바로 그곳이 전설로 내려오는 선인취와(仙人醉臥)가 아니겠는가? 신선님 발에 차여버린 술상이 소반바위이고, 술병은 뒹굴다 거꾸로 꽂혀 버렸으니 그것이 병바위다."

고창 반암마을은 고창의 특산품으로 유명한 복분자의 또 다른 전설이 잉태한 곳이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대기업체에 근무하다 반암마을에 반해 낙향한 조차영 농촌마을종합개발사업 반암권역 전 사무장의 얘기다.

"옛날 반암에 살던 노부부가 늦게 낳은 아들이 몸이 허약해 몸에 좋다는 약을 구해 먹여보았지만 효험을 보지 못했다. 어느날 선운산 주지 승려가 알려준 선운산 검은 딸기를 먹이자아들의 혈색이 날로 좋아졌다. 열닷새가 지나던 후로 부터는 아들이 소변을 보는데 요강이 계속해서 뒤집혀 마침 선운사 주지 승려가 이 마을을 지나가면서 ‘복분자!’ ‘복분자!’라고 웃었다는 것이다. 동네 훈장은 ‘뒤집힐 복(覆), 요강 분(盆), 아들 자(子)’로 해석했다. 그 후로 반암마을 사람들은 복분자를 동네주변에 심어 건강하게 살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고창군이 우리나라에서 고인돌이 가장 많이 남아 있다는 것은 청동기시대부터 근대화 이전까지 번창했던 고을임을 웅변해주고 있다. 산업화가 기승을 부리는 4차산업혁명 시대다. 지리적으로는 십승지가 있는 곳으로 주목받고 고창이 친환경농산물과 히스토리 투어를 덧입혀 먹을거리와 역사문화가 있는 살고 싶은 고창으로 다시 태어나고 있다.



김정모 기자
김정모 기자 kjm@kyongbuk.com

서울취재본부장으로 대통령실, 국회, 정당, 경제계, 중앙부처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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