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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안구정화(眼球淨化)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습니다. 보기에 멋진 선남선녀들과 관련해서 자주 사용됩니다. 보는 사람들의 기분을 좋게 하는 용모를 가진 이들을 상찬하는 말인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그런 기분을 별로 실감을 하지 못했습니다. 사람의 외모는 안에 든 것이 겉으로 비추어진 것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자신이 스스로를 아름답게 여기면 될 일이지 밖에서 구태여 애써 찾을 일이 무엇이겠는가라는, 일종의 신(新) 나르시시즘을 신봉해 왔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노자 도덕경의 ‘아름다운 것이 아름다운 줄 알지만 이는 미운 것일 뿐이다’라는 말에도 별반 어려움 없이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천하 모두가 아름다운 것이 아름다운 줄 알지만, 이것은 미운 것일 뿐이다. 천하 모두가 착한 것만이 착한 줄 알지만, 이것은 착하지 않을 뿐이다. 그러므로 유와 무는 서로를 낳고, 어려움과 쉬움은 서로를 이루며, 길고 짧음은 서로 비교하며, 높고 낮음은 서로 바뀌고, 소리와 울림은 서로 어울리고, 앞과 뒤는 서로를 따른다.(天下皆知美之爲美, 斯惡已; 皆知善之爲善, 斯不善已, 故有無相生, 難易相成, 長短相較, 高下相傾, 音聲相和, 前後相隨) -‘노자 2장’

모든 것이 상대적이므로 현재의 내 판단과 느낌에 매몰되지 말라는 것인데 저는 유독 “아름다운 것이 아름다운 줄 알지만, 이는 미운 것일 뿐이다”라는 구절을 좋아했습니다. 겉으로는 유미주의자인 척했지만, 사실은 미적 존재를 가벼이 여기는 반(反)유미주의자로 살아왔던 것입니다. 물론 한때의 일탈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동방불패’나 ‘중경삼림’ 같은 영화의 여주인공들에 깊이 매혹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때도 아름다운 것 그 자체에 대해서는 의심이 많았습니다. 중년에 들면서 발호하기 마련인 모종의 악성(?) 콤플렉스들의 준동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동안 내 안에서 억압되기만 했던 아니마(여성적 영혼)가 그렇게 ‘힘을 쓰는’ 것이라고 이해했습니다. 하나는 확장이고(동방불패), 다른 하나는 축소라고도(중경삼림) 생각했습니다. 모두 모성 콤플렉스(Mother Figure)의 변주(變奏)일 것이라 마음대로 추측했습니다.

그런데 요즘 들어 저의 신념에 조금씩 금이 가는 것을 느낍니다. 간혹 빛나게 젊고 아름다운 청춘들을 볼 때마다 기분이 엄청나게 좋아지는 것을 느낍니다. 고등학교 시절에 배운 독일어 문장(헤세의 소설 제목이기도 한) “Sch?n ist die Jugend!(청춘은 아름다워라!)”가 절로 떠오릅니다. 정말이지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것들이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까마귀 암수 구별하기가 어렵다(雌雄難辨)’는 말도 있습니다만 사람 마음 역시 그 안을 알기가 오리무중입니다. 어디 미추(美醜) 뿐이겠습니까? 아마 선악(善惡)도 그렇고, 정사(正邪)도 그럴 것입니다. 감정의 단추 하나만 바꾸어 끼우면 하루아침에 극과 극을 오고 가는 것이 인생사인 것 같습니다.

결국은 ‘노자 2장’의 내용으로 다시 되돌아옵니다. 아름답다는 것, 예쁘다는 것은 보는 이의 마음이 대상에 이끌려 그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생기는 감정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못난 것을 싫어하는 것은 이미 내 마음에 미운 정이 들어서입니다. 옛날 어른들이 ‘곱다’라는 말의 반대말로 ‘밉다’를 사용하시던 것이 십분 이해가 됩니다. 아름답게 여기는 것과 추하게 여기는 것이 좋아하고 미워하는 일과 한가지라는 걸 늙어보니 알겠습니다. 사랑할 대상이 많아지니 비로소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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