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화강 선바위 곁에서 지붕만 드러낸 채 자연의 일부 되다

입암정은 1940년 학성이씨 문중에서 매입해 용암정으로 개조했다.
□울산의 젖줄 태화강에 선 입암정

태화강은 울주군 상북면 가지산 쌀바위, 백운산 탑골샘 등에서 발원해 울주군 언양읍을 거쳐 울산시가지를 가로지른 뒤 동해의 울산만으로 빠져나간다. 울산 서쪽과 북쪽의 산간에서 흘러내려 울산만으로 빠져나가기 까지 덕현천 언양천 대곡천 척과천 동천 등 57개의 소하천이 합류한다. 유역면적 643.96㎢에 유로연장이 47.54km이며 899종의 동식물이 이 강에서 산다. 강의 이름은 신라의 자장율사가 1,300여년전에 태화사를 건립한데서 비롯됐다.

태화강은 울산의 대표적 명승지다. 울산 12경 중에서 태화강공원과 십리대숲이 제1경으로 꼽힌다. 태화강 대공원은 전국 12대 생태관광지역으로 선정됐고 태화강 양편에 펼쳐지는 십리대숲은 눈부시게 아름답고 상큼하다.

입암정은 울주군 범서면 태화강변에 있다. 상북면에서 흘러내려온 태화강 원류와 대곡천이 합류해 몸을 키우는 지점, 입암 (선바위) 뒤에 있다. 강 건너편 선바위공원 주차장에서 푸른 강물과 우뚝 선 입암, 입암 뒤의 입암정을 보노라니 탄성이 절로 난다. 입암은 홀로 산에서 떨어져 나와 강물 위에 우뚝 하고 저홀로 숲을 이루어 황엽의 단풍을 달고 서서 천년 만년 고고하다. 입암정은 그 뒤에 기와지붕만 드러낸 채 스스로 자연의 일부가 돼 경물로 남아있다.

입암에 대한 기록은 여러 곳에 나오는데 ‘학성지’가 비교적 자세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학성지’는 ‘태화강 상류에 있다. 돌이 쌓여서 만들어졌는데 뿌리는 물 바닥에 박혀 있다. 높이는 수십 길이 되고 길이는 10여 아름쯤 된다. 바위틈에는 한 움큼의 흙도 없는데도 초목이 무성하다. 물 건너 몇 십보 쯤 되는 동쪽언덕에 푸른 벼랑이 가파르게 끊어져 있다’라고 쓰고 있다. 학성지는 입암이 있는 곳을 입암연이라고 했다. ‘입암연은 서쪽 20리에 있다. 우뚝 솟은 바위가 있고 못 속의 물이 검푸르다. 세상에 전해지기로 용이 있어서 비를 빌면 감응이 있다고 한다’라고 썼다.

입암은 오래전부터 울산의 명승으로 이름이 났다. 시인묵객의 발길이 잦았고 울산으로 출장온 관리들도 이곳에 들러 시를 읊고 남겼다.

선바위 공원 주차장에서 본 입암과 입암정


쇠를 깎은 듯 열 길이 넘는 기이한 바위가

못 가운데 거꾸로 꽂혔으니 그림도 그와 같지 않으리

저녁 연기가 층을 이루어 넓게 퍼져 반만 드러나는데

날아오른 들거위가 고기를 물려고 떨어지네

바위밑 물이 돌아가는 곳, 이곳이 용추라네

(중략)

주인은 담소하며 고기떼를 구경하고

흥겨워 돌아오는 물가에는 이슬이 자욱하네

마두에 떠오르는 달을 보고

그제서야 놀랐어라 때는 이미 가절중추였음을

- 김종직의 시 ‘팔월보름 절도사를 모시고 입암에서 놀다’


산에서 떨어져 나와 강물에 발을 내리고 있는 입암.

□입암은 얼굴, 입암정은 눈썹

입암정은 조선 정조 때인 1796년 울산부사 이정인이 지었다. 2칸 규모이고 이와 접하여 3칸짜리 집이 있었다고 전한다. 이 집은 은암암 (隱巖庵)이다. 입암정이 드러냄이라면 은암암은 숨어있는 형국이다. 암자와 정자 이름에서 기묘한 대조를 이룬다.

입암정을 세운 부사 이정인은 ‘입암정기’에서 이렇게 말했다. ‘정자는 바위 때문에 만든 것이니, 이 바위가 없다면 어찌 정자를 세웠으리요. 못가운데 매우 우뚝한 바위가 있는데, 높이는 수십 길이 되고 돌아 쌓여 기이한 절벽을 이루고 있어서 그것을 쳐다보면 높고 가파르므로 입암이라 한다. 바위 북쪽에는 푸른 벼랑이 들러싸고 있는데 다만 한 줄기 산 기슭이 남쪽으로 뻗어서 작은 터를 이루고 있으므로 마침내 몇 개의 서까래를 걸어놓았다. 이것이 입암정이다’

울산부사는 기문에서 촉석루와 수미정은 모두 산에 기대거나 붙어있는데 어떻게 바위가 홀로 물속에 서 있는 것과 같겠느냐며 바위의 아름다운 경치 때문에 정자를 지었다고 했다. 정자를 짓지 않았다면 입암의 뒤에서 보는 바위와 바위아래를 흐르는 강물, 강너머 들판과 산을 완상하기는 힘들었을 터. 이정인은 새로운 풍경하나를 열었던 셈이다. 이미 입암의 절경을 노래했던 김종직은 입암정이 건립된 뒤 다시 입암을 찾아 시를 남겼다.

입암정에서 본 입암.


돌어른은 천겁 세월 높고 높은데

바람이 갈고 물결이 갉으니 몸은 더욱 견고하네

위태로운 누각에서 아래로 굽어보니 많은 땅은 없는데

한줄기 물이 통하니 작은 하늘이 있네

옮겨온 봉래도는 하얀 뼈대가 솟아있고

안온한 금화산에는 하얀 양이 잠을 자네

머뭇거리며 열 걸음을 걸으면서도 자주 머리를 돌리는데

이별이 애석하며 말이 앞으로 가지 않은들 무슨 상관있으리

- 김종직의 시 ‘입암에 차운하다’



입암정은 공공적 성격이 강했다. 주로 시회나 강론이 펼쳐졌다. 1922년까지 강회가 열렸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회당 장석영은 1922년 울산 반구대에 들어 시와 모은정기(慕隱亭記)를 남겼는데 이때 입암정에도 들러 ‘입암점강회’라는 시를 남겼다.

입암정에서 바라보는 입암, 선바위는 가을에 젖어 여느 때 보다 아름답다. 흙도 없는 바위에 수목이 빽빽한데 저마다 가을에 물들어 노랗고 빨갛게 치장을 하고 있다. 바위가 뿌리를 내린 입암연 강물은 눈이 부시게 푸르고 강건너 이름 모를 산은 선바위를 마주보며 깊어간다. 부르는 대로 시가 되고 그리는 대로 그림이 되는 풍경이다. 정자에서 내다보는 풍경이 경승이고 강건너에서 정자를 바라보는 풍경이 또한 경승이 됐다. 중국 북송의 화가 곽희는 “산은 물로써 혈맥을 삼고 물은 산으로써 얼굴을 삼으며 정자로써 눈썹과 눈을 삼는다”고 했는데 입암정은 입암을 얼굴로 삼고 자신은 바위의 눈과 눈썹 노릇을 하며 자연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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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화강변 선바위 뒤에 숨은 둣 자리 잡은 입암정자리. 지금은 용암정으로 바뀌었다.

□ 입암정 빨리 제모습 찾아야

입암정은 ‘입암정이 있던 자리’다. 1922년 장석영이 ‘입암정강회’를 끝으로 입암정에 대한 기록은 찾을 수 없다. 현재는 용암정(龍巖亭)이 들어섰다. 학성이씨 송옹공계문중 재산이다. 용암정 안내문에 그 사연이 적혀있다. ‘1796년 울산부사 이정인이 현 정자터에 이간의 입암이란 정자를 세웠으나 보존되지 못하고 빈터로 남았다. 송옹공 육대손 석만이 부지 480평을 취득하여 송옹공 종중에 희사하자 후손들이 성금을 모아 용암정을 창건했다’ 입암정이 용암정으로 바뀌면서 용도와 기능이 바뀌었다. 입암정은 벽과 방을 두지 않고 사방이 트인데 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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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사진
김동완 자유기고가
하여 용암정은 사면에 모두 벽을 두고 벽마다 문을 달았다고 한다.

용암정의 문을 굳게 닫혔다. 내부를 들여다보니 관리를 하지 않는지 정자 벽에 낡은 가구가 방치되고 있고 사람의 손길이 미친 지 오래된 것처럼 보인다. 이해할수 없는 것은 울산시다. 울산시는 2009년 울산시 선바위공원 조성 계획을 세우고 2015년까지 입암정을 복원키로 했다. 그런데 계획을 발표한지 7년이 다 돼도록 입암정 복원은커녕 용암정마저 방치되다시피하고 있다. 아름다운 문화자원이 빨리 본래의 제 모습을 찾도록 울산시가 좀 더 노력 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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