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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정체성을 말한다] 9. 선화공주

백제 대표사찰 '미륵사' 창건…지략·전략 겸비한 퀸 메이커

정진원 동국대 연구교수 cho@kyongbuk.com 등록일 2016년10월27일 19시26분  
미륵사지

‘삼국유사’는 사람이 주인공인 사람 중심의 이야기이다. 사람은 남성과 여성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책 속에서는 거의 대부분 남성이 주인공이고 중심에 있다. ‘삼국유사’는 남성 중심의 역사책이지만 ‘삼국사기’나 ‘고승전’ 등과는 달리 여성성을 간과하지 않는다. 얼핏 남자들의 이야기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중심 역할을 하고 있는 주인공은 여성인 경우가 많다. 행간의 뜻을 읽으면 훌륭한 남성 뒤에 그보다 몇 배 더 현명한 여성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삼국유사’의 반전 코드이다. 

먼저 ‘삼국유사’ 속 선화공주의 간략 스토리텔링은 다음과 같다.

백제 30대 무왕(武王 재위 600~641)은 어머니가 과부인데 남쪽 못 가의 용과 관계하여 낳았다. 어릴 때 이름은 마를 캐다가 팔아 서동(薯童)이라고 했는데 재주와 도량이 커서 헤아리기 어려웠다.

한편 신라 진평왕(眞平王 재위 579~632)의 셋째 공주 선화(善花,善化)가 뛰어나게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는 머리를 깎고 서라벌로 가서 마을아이들에게 마를 주고 꾀어서 자신이 지은 동요를 부르게 했다.

선화공주님은
남몰래 정을 통하고
서동방(薯童房)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


동요가 대궐까지 퍼지자 신하들은 임금에게 극력 간해서 공주를 먼 곳으로 귀양 보내게 하였다. 떠날 때 왕후는 순금 한 말을 주어 노자로 쓰게 했다. 서동은 기다렸다가 공주에게 절하면서 모시고 가겠다고 했다. 공주는 그에 대해 알지 못했지만 짝이 되어 믿고 좋아하니 따라가면서 서동과 그윽히 정을 통했다.

그런 뒤에야 공주는 서동의 이름을 알았고, 동요의 징험도 믿게 되었다. 함께 백제로 와서 모후가 준 금을 꺼내 놓고 살아 나갈 계획을 의논하자 서동이 크게 웃으며, “나는 어릴 때부터 마를 캐던 곳에 황금을 흙덩이처럼 쌓아두었소.”하였다. 공주는 이 말에 “그것은 천하의 가장 큰 보배이니 그대는 우리 부모님이 계신 대궐로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서동은 “좋소이다.” 화답하였다.

두 사람은 신통력 있는 지명법사에게 부탁해 그 금을 신라 궁중으로 보내고 진평왕은 그 신기한 조화를 특별하게 여겨 더욱 서동을 존경하고 항상 편지를 보내 안부를 물었다. 서동은 이로 인해 인심을 얻어서 드디어 왕위에 올랐다.

▲ 익산 옛 지도
미염무쌍(美艶無雙), 아름답고 맵시 곱기가 짝이 없다라고 표현된 선화공주는 그동안 ‘서동요’의 주인공으로 억울한 루머의 희생양으로만 부각되어 왔다. 그 노래 내용도 서동이 아니라 선화공주가 주도하는 모양새로 밤마다 서동을 만나 사랑을 나눈다는 내용이다. 아름답고 매력적인 모습에 지략과 전략을 겸비한 선화공주의 반전이 시작된다. 이것이 선화공주에 대한 첫 번째 관전 포인트이다.

바로 아버지 진평왕에게 쫓겨난 신세가 되지만 나중에 백제 무왕의 아내 곧 백제 왕비가 된 신데렐라스토리 유형처럼 보인다. 그러나 ‘삼국유사’ 속의 기록을 정독하면 선화공주는 바보 온달을 장군으로 만드는 평강공주 이상으로 야심찬 인물이다. 금도 몰라보는 일개 마를 팔던 청년에게 금의 가치와 그것의 활용 방법을 가르친다. 곧 지명법사를 매개로 하여 아버지 진평왕을 설득해 남편 서동이 백제 무왕에 오르도록 하는 것이다.

인생 최대의 위기에서 이정도 반전의 결실을 맺은 선화공주의 전략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물론 부창부수 남편인 서동도 예사롭지 않은 인물이다. 서동의 출생 또한 어머니가 과부의 몸으로 연못의 용을 아버지로 하여 태어나게 된다는 평범하지 않은 설정이다. 과부임에도 불구하고 ‘용’으로 상징되는 ‘왕’과의 만남은 어머니 또한 출중한 면모를 지녔음을 시사한다. 어머니와 함께 마를 캐며 살았어도 기량을 헤아리기 어려웠다는 표현에서 이웃나라 신라의 어여쁜 공주를 얻을만한 지략과 용기가 있었음을 본다.

왕의 서자 출신인 서동이 선화공주에게 왕실의 법도와 금의 가치를 배우고, 장인인 신라 진평왕의 신임을 지지기반 세력으로 하여 왕위에 오르게 되는 것이다. 선화와 서동, 진평으로 이루어진 신라와 백제가 상생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win-win 전략이다.

그동안 삼국유사의 이 이야기는 신라공주와 백제왕자의 사랑이야기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드라마나 축제, 공연 등이 이루어져 왔다. 이제는 선화공주가 예쁘기만 한 신라공주, 서동의 아내, 무왕의 왕비로만 기억될 것이 아니라 남편 서동의 킹메이커, 신라 황룡사보다 규모가 큰 백제 대표 사찰 ‘미륵사’를 창건한 창건주, 백제 마지막 왕인 의자왕의 어머니로서 재조명되는 콘텐츠가 필요한 때이다.

특히 최근 2010년 익산 미륵사 서탑에서 발굴된 ‘금동사리봉안기’의 주인공 ‘사탁적덕’의 딸인 ‘백제왕후’와의 관계 정립과 해석도 흥미로운 콘텐츠가 될 것이다. 미륵사 서탑에서 백제왕후가 ‘가람을 조립했다’는 금동사리봉안기의 기록으로 일부 학자들은 삼국유사의 선화공주를 허구의 인물로 몰아가려는 경향도 보이고 있다. 필자는 이 둘이 모두 역사적인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그 둘의 존재와 관계를 살려낼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하여 백제왕후가 기록된 사리봉안기와 선화공주가 기록된 삼국유사의 기록을 면밀히 대조하여 살펴보았다.

백제왕후는 ‘가람’을 ‘조립(造立伽藍)’하였고 선화공주는 ‘대가람’을 ‘창’하였다고(創大伽籃, 各三所創之)되어 있었다. 조립은 ‘승방(僧房), 정사(精舍)’나 ‘불상(佛像)’ 등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구조물을 만들 때 사용하고 있는 반면, 창(創)은 어떤 일을 無에서 有로 만들고 새롭게 시작할 때 쓰인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곧 훈민정음 창제(創制), 조선왕조 창업(創業) 등이 그것이다.

미륵사는 삼국유사의 선화공주가 삼원삼탑(各三所) 대가람의 전체 설계와 인프라를 구축한(創之) ‘창건주체(創建主體)’이고, 사리봉안기의 백제왕후는 ‘가람(伽藍)’의 구체적인 건축물 가운데 하나인 삼 탑 중 ‘서탑’을 만든 ‘조성주체(造成主體)’로 해석을 하는 것이다. 그러면 42년간이나 통치한 무왕이 첫 번째 왕후로 선화공주를, 그 이후의 왕후로 사탁씨의 딸을 배필로 맞는다고 해도 별 무리가 없을 것이다.

한편 진평왕의 큰딸인 언니 선덕여왕과의 관계도 곰곰이 짚어봐야 할 것이다. 고구려, 백제, 당나라가 줄지어 신라를 침략하는 최대의 위기를 맞게 된 상황을 역전의 기회로 멋지게 반전시켜 통일신라의 기틀을 다진 선덕여왕, 그리고 자칫 루머의 희생양으로 전락할 수도 있었던 선화공주의 백제 왕비 등극으로 이어지는 통쾌한 반전이 절묘하게 닮아 있음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두 자매의 역사적인 불사(佛事)의 기량 또한 우열을 가릴 수 없을 만큼 닮은 꼴이다. 선덕은 신라 최대의 황룡사 구층탑을 세우고 선화는 백제 최대의 익산 미륵사를 세운다. 선화공주가 진평왕의 셋째 딸이 아니라는 설과 그러므로 선덕과 자매도 아니라는 설왕설래를 단칼에 잠재우는 유전자이다.

▲ 정진원 동국대 연구교수
신라 황룡사에 비견되는 익산 미륵사를 건립하자고 제안한 것도 선화공주이다. 아버지 진평왕은 딸과 사위의 나라 백제에 미륵사를 짓는 공장바지들도 파견하는 등 아낌없는 지원을 한다. 보통 1금당 1탑인 가람 양식이던 시절 백제에는 미륵 삼존을 모시는 3금당 3탑 양식의 전에 없던 대사찰이 건립되었다고 삼국유사에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요즈음 대중들에게 조금만 인기를 얻으면 ‘국민 여동생’이니 ‘세기의 결혼식’이니 하는 수식어를 남발한다. 신라와 백제가 결합하여 삼국통일 전에 사랑으로 양국통일을 이룬 선화와 서동 정도는 되어야 세기의 로맨스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신라와 백제의 정략 결혼이라 볼 수도 있지만 선화공주는 짐짓 사랑에 응하는 체하며 신라와 백제를 아우른 지모가 출중한 여성으로 재평가해야 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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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석 기자

    • 조현석 기자
  • 뉴미디어국장 입니다. 인터넷신문과 영상뉴스 등 미디어 분야를 맡고 있습니다. 010-5811-4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