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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가] 33. 영덕 안동권씨 오봉종택

단종 복위운동 충신 권책의 충절을 기리다

최길동 기자 kdchoi@kyongbuk.com 등록일 2016년10월30일 16시36분  
▲ 오봉종택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 여러 성씨와 문중이 함께 마을의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다.

마을 중앙에 자리 잡은 오봉 종택(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5238호)은 정면의 삼문 대문채를 지나 오봉헌(五峯軒)과 사당을 잇는 중심축에서 우측으로 자리하고, 좌측에는 벽산정(碧山亭)이 배치돼 있다. 안동권씨 부정공파 입향조인 권책(權策 1444~ )이 거주하던 종택으로 지었는지 200여 년이 지난 후 화재로 소실된 것을 재건해 건물과 주변 환경을 잘 정돈했다

건물들은 남향으로 지어져 있다. 솟을삼문과 오봉헌(五峯軒), 사당(祠堂)을 잇는 중심축에서 우측으로 ‘ㅁ’자형 종택이 자리하고 좌측에 3자 정도의 높은 축대를 조성한 후 벽산정(碧山亭)을 세웠다. 사당은 오봉헌보다 높게 대지를 조성한 후 전면에 일각문을 두고 방형으로 토석 담장을 둘러 공간의 위계성을 높였다

△ 정침

정면 5칸 측면 4칸 규모로 전면 좌측에 마루방 한 칸을 돌출시키고, 정침은 2칸 안대청을 중심으로 우측의 안방과 좌측으로 주칸이 넓은 건넌방이 자리하고 건넌방이 좌익사와 연결되면서 우물마루를 시설한 고방 사이에 통래칸을 두어 정침 좌측으로 출입 할수있도록 했다.

종택의 구조는 동자주형 대공을 세운 3량 구조로 정침 가운데 원주 위에만 주두를 설치한 민도리 집이다.

사랑 부문은 전면 가운데 통래간을 중심으로 온돌방 1칸을 합해 사랑 공간이 마련되고 앞쪽으로 툇마루를 두어 사랑으로 출입이 용이 하도록 배려했다.

오봉헌


△오봉헌(五奉軒)

자연석 기단 위에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로 정면 3칸은 툇마루를 두면서 마루뒷편에 온돌을 구성했고 방과 방 사이에는 미서기를 설치 공간을 확장 할 수 있도록 하면서 방 뒤쪽으로 수장 공간인 벽장을 마련했다. 좌협칸 2칸은 전면에 4분합 들문을 달고 좌측면과 뒷면은 삼 벽 에 쌍여닫이 골판 문을 설치해 폐쇄된 마루방을 꾸몄다

온돌방과 마루방은 쌍여닫이 세 살문을 설치했고 전면쪽 창호는 하부에 머름을 설치한 쌍여닫이 세 살문을 달고 툇마루 양측면도 외여닫이 골판문을 달아 측면에서는 시선을 차단하면서 문을 통해 출입동선이 연결되도록 했다. 상부구조는 간략한 5량가 이고 전면만 무익공 소로수장으로 장식했다.

▲ 벽산정


△벽산정(碧山亭)

정면 4칸 측면 2칸반 규모이고 겹처마 팔작지붕이며 평면은 어간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둔 중당협실형이며 전면에는 반 칸 규모의 뒤칸을 두었고 제형 판대공을 세운 5량 구조며 기둥 상부는 양서와 수서를 겹치고 그 위에 봉두로 장식된 이익공 형식이다. 주칸에 창방과 도리장혀 사이에 화반을 1구씩 설치해 상부 하중을 받도록 했다.

△ 사당(祠堂)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로 전면에는 4자폭의 툇칸을 두고 뒤편 3칸을 통으로 제향공간을 설치하고 위패를 봉안 했다.

내부는 우물마루를 깔고 뒤편 벽에 기대어 상부에 벽감을 설치했고, 툇간 상부와 내부는 우물 천장을 설치해 상부구조가 보이지 않도록 마감했으며, 상부구조는 대량 위에 공아를 쌓아 중도리를 얹은 5량가 이다. 사당 전면은 살미당이 날카로운 수서형 익공을 2단으로 얹은 이익공형식이며 겹처마 맞배지붕이다.

자해 (紫海 ·寧海)는 교남(嶠南:嶺南)의 이름남 고을이다,

“인량(仁良)은 자해(紫海)의 신령스런 지역이다. 등운산(騰雲山)이 비단병풍 같이 둘러있고 작천(鵲川)이 비단 허리띠 같이 두르고 있으며 ~ 중략 ~ 아! 저 장릉(莊陵)의 시대에 여러 현인들이 절의를 위해 죽은 것을 숭상하며, 살아서 그 의리를 온전히 함에 해와 별 같이 빛나고 늘름하기가 서리와 눈 같아 세상에서 6신(六臣)이라 칭송하고 있는 바이고 6신의 외에 오봉 권선생 같은 분이 있을 따름 이다... ”‘오봉헌 중건기’( 안동권씨 부정공파 영해 입향조 오봉 권책 )

조선조 4대 세종 임금의 뒤를 이은 문종은 자신의 단명을 예견하고 황보인, 남지, 김종서 등에게 자기가 죽은 뒤 어린 왕세자(단종)가 등극하였을 때, 그를 잘 보필할 것을 부탁했다. 그러나 수양대군은 1453년 김종서의 집을 불시에 습격해 그와 그의 두 아들을 죽였다 이 사건이 계유정난(癸酉靖難)의 시작이다.

권책(權策 1444 ~ )의 자는 경지(經之) 호는 오봉(五峯) 본관은 안동이며, 부친 권자홍(權自弘) 은 1427년 전시 을과를 급제해 지평, 한림 등을 역임했고, 맹사성, 윤희, 김문기 등과 함께 태종실록을 편찬했으며 홍문관 부제학으로 문종의 비 현덕황후(顯德王后) 권씨와 4촌간 이다. 세조 2년인 1456년에 종부(宗父) 충장공 권자신(權自愼) 과 형(兄) 권저(權著)와 권서(權署)가 사육신과 단종복위 모의에 참여했는데 모의가 발각돼 집안에 화가 입었다.

권책은 나이가 어려서 화를 면하고 영해로 귀향왔다. 유배 생활 중 금성대군의 단종 복위운동의 실패와 단종의 승하 소식을 듣고 지극한 충성심으로 애통해 왔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훗날 장릉(장릉·조선6대 단종의 능)유신(莊陵遺臣)으로 지칭 되기도 했지만 아쉽게도 관련 사료로 방증을 얻을 수 없다. 창수 미곡의 단양 신씨 딸과 혼인 한 후 인량리에 정착했다.

왕바위사적지

◇권책과 왕바위 이야기

창수면 인량리 뒷골에 커다란 왕바위가 있고 그 바위를 중심으로 주변에 여섯 신하(사육신 지칭)가 엎드려 예를 표하는 듯한 기이한 형상을 한 바위를 왕바위라 한다.

어린 조카 단동을 쫏아 내고 왕위에 오르자 권 책은 단종 복위운동에 연루됐는데 당시 나이 13세로 참형을 면하고 이곳 영해 부 유배돼 귀양살이 했다,

이때 금성대군이 단종 복위를 위해 군사를 일으켰다가 실패하자 권 책은 죽령고개에서 대성통곡을 했으며 단종의 승하 소식을 듣고 이 왕바위를 끌어안고 피맺힌 통곡을 하다가 여러 번 기절했다고 한다. 이후 사람들은 이 바위를 왕바위라 불렀다. 권 책은 매월 초하루 보름에 왕바위에 가서 분향하고 종일토록 통곡했으며 두문불출하고 눈물로 세월을 보냈다 한다.

또한 “분을 못이겨 분하여 울부짖음에 하늘과 땅이 노하고 원통한 울음소리에 귀신이 슬프한다”(憤號天地怒 寃泣鬼神悲 )라는 시를 지었다 한다. 고종 때 후손과 마을 사람들이 그의 충절을 추모하여 ‘왕바위(王巖)’이라는 두 글자를 바위에 새겼으며, 멀고 가까운 선비들이 한자리에 모여 주옥같은 추모시를 지었 바쳤다고 했다.

권책은 1834년(헌종 즉위년) 창건된 충현사에 문종비 현덕황후의 동생 종숙 권자신, 후손, 권상길과 함께 배향되었다. 충현사는 1855년(철종 5년) 서원으로 됐다가 1868년(고종 5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됐다. 그 자리에 대봉제사(大峯濟舍)가 세워졌으며, 1999년 12월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381호로 지정됐다. 영덕군에서는 오봉종택이 소재 한 창수면 인량리 일대를 3대 문화권 문화, 생태, 관광기반 조성사업으로 관광객의 좋은 휴식처로 새로 단정했고, 새로운 관광 명소로 관광객 맞을 준비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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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길동 기자

    • 최길동 기자
  • 영덕 담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