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호.jpg
▲ 김종호 호서대교수
서양사에서 르네상스라는 정신운동에 지쳐있는 상황에서 아직 계몽주의가 등장하지 않았던 시기에 나타난 특이한 정신이 바로크(Baroque)라 불리는 문화양식이다. 바로크는 불협화음으로 인한 비정상적인 소리를 의미한다. 바로크 시대 인물들은 모두 무언가에 미쳐 제정신을 잃고 병리적인 환각 상태에 빠져 있었다. 광신적이며 병적인 비합리적 요소에 의하여 사람들은 이성을 잃었다. 심한 우울증을 앓고 있는 햄릿, 간질병적 발작을 일으킨 오델로, 분노의 폭발을 일삼은 리어왕, 냉정을 잃고 허공에서 환각을 보는 맥베드 같은 셰익스피어가 만든 인물 유형이 바로 바로크 성격을 잘 반영하고 있다. 바로크 시대의 인간상은 한결같이 격노해 있다. 사람들은 그것이 무슨 권리인양 분노의 배출을 일상화하였다. 이렇게 억제되지 않은 분노는 당대의 문화에 그대로 투영돼 있다. 연극이 특히 그러하였다. 무대장치는 요란하고 배우의 복장은 기괴하였다. 관객들은 오싹하고 아찔한 기분을 맛보려고 극장에 갔다고 한다. 사람들은 본능을 자극시키고 리비도(libido)를 폭발시키는 재미로 살았다. 그들은 극장 안에서 괴성을 지르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한마디로 좀 볼썽사나웠다. 확실히 이런 바로크적인 요소들은 무언가 새로운 시대가 나타나기 직전의 돌발적인 현상임에 분명하다. 바로크 시대가 끝나면서 서구에 강력한 합리주의가 나타난 것이 이를 증명한다. 요약하면 바로크 정신은 합리주의가 등장하기 이전의 전주곡 같은 것이었다.

오늘의 대한민국을 조망하노라면 바로크 시대 다양한 인간 군상들의 기괴한 비명을 듣는 것 같다. 우리는 지금 21세기를 살지만, 현재 대한민국 시국은 바로크 시대 말기적 상황과 너무 유사하다. TV 채널마다 분출하는 휘발성 뉴스를 보면 여간 닮은 것이 아니다. 광장과 거리는 온통 불만의 배출이 물결을 이루고 괴성이 넘쳐나고 있다. 낡은 체제의 붕괴와 그로 말미암아 생긴 불안이 가라앉고 새로운 세계가 자리 잡기 시작한 시기에 대두된 바로크 시대처럼 말이다. 바로크는 그레코로만적인 자아(自我)가 무너지고 아직 새로운 가치를 제어할만한 세력이 나타나기 이전의 중간상태에서 제어되지 못한 리비도가 발작되어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지난 30년간 지속된 질곡의 87년 헌법체제가 영락없이 바로크 시대를 닮았다. 바로크는 인간 내면의 모순과 무정부적 상태를 배격하고 새로운 세상의 건설을 향하여 돌진하도록 이끌었다. 이제 우리는 바로크라는 구체제를 깨뜨리고 조속히 신체제를 구축할 때이다. 개헌이 필요하다. 그러면 어떤 방식으로 신체제를 구축해야 하는가? 호들갑 대신 청교도주의를 권고한다.

중세기적 통제에서 탈피한 서구정신은 바로크적으로 발작하든지 새로운 방향을 찾아야만 했다. 청교도주의는 가톨릭 체제에서 방향감각을 상실한 인간들에게 하나의 반작용을 일으킨 운동이었다. 가톨릭 세계를 무너뜨린 인간들은 거기에 따른 아나키 상태를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결국, 청교도주의를 모토로 새롭게 설계한 피안으로 도피했다. 청교도들은 바로크같이 정동적인(dynamic) 감정을 그대로 노출시킬 수는 없었다. 청교도주의는 가톨릭신앙에서 일탈로 인하여 생긴 천벌의 무의식적인 두려움에 대한 반동에서 생겨났기 때문이다. 따라서 청교도주의는 바로크와는 다르게 중세기적 정신에 순응한 것이었다. 다만, 중세기적인 초자아(超自我)보다 한층 더 엄격한 계율로 세상을 이끌었다.

혼돈의 대한민국! 더 이상 바로크로 회기는 곤란하다. 국민 모두가 청교도주의 같은 경건함과 엄격함을 찾았으면 한다. 혼탁한 정국을 청교도적 염결성으로 씻어내야 한다. 개헌을 통한 안보와 경제회복은 분노의 배출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오로지 철저한 평정심으로 무장할 때만 가능한 일이다.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