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산·낙동강 정원으로 끌어 안고 마침내 자연과 하나되다

복례문에서 본 만대루

안동시 풍천면 병산리에 있는 병산서원(屛山書院)은 하회마을, 부용대와 함께 안동 관광의 필수코스다. 낙동강의 물길이 하회마을에 와서 크게 S자로 그리며 마을을 돌아가는데 그 물길의 한 가운데에 화산이 물길을 막아서고 있다. 화산 자락의 양쪽 끝에 하회마을과 병산서원이 자리를 잡았다. 부용대는 하회마을과 강을 사이에 두고 한눈에 마을을 굽어보고 있다.

병산서원 현판


병산서원은 안동일대의 조산인 학가산에서 시작한 지맥이 화산에서 끝을 맺는 지점에 있다. 서원 앞은 낙동강이고 낙동강에 발을 내린 산이 병산이다. 뒤에는 완만한 화산을 두고 앞에는 푸르고 푸른 강물이 흘러간다. 강 건너편에 강물에 발을 내린 수직의 병산이 푸른 병풍을 펼쳐놓고 있다. 서원은 강변으로도 산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가운데에 자리 잡았다. 건축가 김봉렬은 이것을 ‘꽃의 형국’이라고 해석했다. 그는 ‘학가산 일대를 뿌리로 보면 풍천명 일대의 줄기부를 지나 화산에서 꽃을 피우고, 꽃의 수술에 해당하는 정혈’이라고 말했다.

병산서원은 도동서원 도산서원 소수서원 옥산서원과 함께 조선시대 5대 서원으로 꼽힌다. 서애 류성룡과 아들 류진을 배향하는 서원이다. 병산서원의 모태는 안동부 풍산현에 있던 풍악서원이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하여 안동에 왔을 때 토지 800두락을 내려준 곳이다. 1572년 류성룡이 현재의 장소로 옮겼으나 임진왜란 때 불에 탔다. 광해군 2년에 류성룡의 제자 우복 정경세가 중심이 돼 서애의 업적과 학덕을 기려 존덕사를 짓고 향사하면서 서원이 됐다. 철종 14년(1863)에 병산서원이라는 사액을 받았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당시 폐철되지 않은 47곳 가운데 하나다.

입교당에서 본 만대루 (2)

서원은 외삼문인 복례문, 만대루, 강당인 입교당, 내삼문, 사당인 존덕사를 두고 있다. 강당 좌우에는 동,서재를 강당 뒤에는 전사청과 장판각을 배치했다. 앞에 강학공간을 두고 뒤에 배향공간인 사당을 두는 ‘전학후묘’ 배치다. 류성룡은 퇴계 이황의 제자다. 학봉 김성일과 함께 동문수학했다. 동문수학한 두 사람은 대한민국 역사 속에서 류성룡은 임진왜란을 극복한 명재상으로, 김성일은 당파싸움하느라 임진왜란이라는 병화의 단초를 제공한 사람으로 끊임없이 대비된다.

김성일은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2년전 통신사로 일본을 다녀왔는데 일본이 전쟁을 일으키려고 하니 우리도 준비를 해야 한다는 황윤길과 반대로 일본은 전쟁을 일으킬 의도가 없으며 도요토미의 얼굴은 쥐와 같은 형상을 하고 있어 두려워할 것이 없다고 말했다. 결국 김성일의 주장을 받아들여 전쟁준비를 소홀히 하는 통에 조선은 2년 뒤 임진왜란을 맞아 속수무책으로 피해를 입었다.

반면 류성룡은 전쟁이 일어나자 무명의 장군 이순신과 권율을 발탁해 천거하고 요동으로 망명하려는 선조를 붙들었다. 영의정이 되어서는 방방곡곡에서 의병이 일어설 수 있도록 제도를 만들어 임진왜란을 극복한 스타로 등극했다. 전후에는 안동의 옥연정사에 들어 앉아 ‘징비록’을 저술했다.

류성룡 사후 12년인 1620년 그 유명한 ‘병호시비’가 일어났다. 퇴계학파는 퇴계의 위패를 봉안한 여강서원에 류성룡과 김성일의 위패를 함께 봉안해 명실상부한 퇴계학파의 본산으로 삼으려 했다. 문제는 누구의 위패를 퇴계 왼쪽에 놓느냐는 것이었다. 좌고우저의 원칙에 따라 서열이 높은 사람이 당연히 왼쪽 자리를 차지하게 돼 있는데 좀 복잡한 문제가 있었다.

벼슬은 영의정을 지낸 류성룡이 높았고 나이는 김성일이 4살 많았다. 서애학파와 학봉학파간 갑론을박이 오가고 여론이 갈라졌다. 그때 류성룡의 수제자 정경세가 ‘견수(肩隨)’와 ‘절석(絶席)’을 들고 나왔다. 견수는 5살이상 차이가 나면 연장자로 대접하여 어깨를 나란히 해 걷지 않고 조금 뒤처져 따라간다는 뜻이다. 정경세는 학봉은 서애보다 4살 연상이니 견수에 미치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절석은 중국 한나라때 어사대부 상서령 같은 고위직은 어느자리를 가더라도 전용석을 마련하여 다른 사람과 같이 앉지 않는다는 데서 비롯됐다. 서애는 영의정을 지냈으므로 관찰사를 지낸 학봉이 공적인 자리에서 같이 앉을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위패의 상석은 서애의 자리라는 주장이다.

논란 끝에 서애의 위패가 동쪽에 놓였다. ‘애동학서(厓東鶴西)’다. 이후 이 문제를 놓고 말썽이 끊이지 않자 1629년 서애의 위패는 다시 병산서원으로 돌아왔다. 그 후 여강서원은 호계서원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사람들은 400년간 퇴계의 좌우에 누가 자리하는냐를 놓고 갈등했다. 이 갈등을 ‘병호시비’라고 불렀다. 400년동안 계속된 시비는 2013년 경북도의 중재로 주벽에 퇴계를, 좌우에 서애와 학봉의 위패를 봉안함으로써 끝을 맺었다.

병산서원의 하이라이트는 만대루다. 만대루는 휴식과 강학 공간이다. 급제자들의 환영잔치가 벌어지곤 했는데 유생들은 여기서 놀기도하고 연희를 구경하기도 했던 모양이다. “서원 출신 급제자들이 귀향하면 광대패들이 유희를 벌이는데, 절대 서원 안으로 들이지 말고 바깥에서 연희를 벌이게 하라”는 규정까지 두고 있다.

만대루가 있기 때문에 병산서원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면 7칸 측면 2칸의 촌스럽다시피한 누각은 한국 전통건축의 구조미학을 모범적으로 보여주는 건물이다. 군더더기 없는 최소성과 그것으로부터 얻어지는 구조적 효율성의 아름다움이다. 만대루는 꼭 필요한 요소들로만 만들어진 건물이다. 어떤 장식도 기교도 없다. 누하주 기둥은 굽은 나무를 그대로 썼고 부재도 나뭇결을 그대로 드러냈다.



강은 겨울 산의 누각을 건너고

성은 아득한 변방의 누대보다 높도다

푸른 병풍을 두른 듯한 산은 마땅히 저녁 늦도록 마주해야 할 것이고

하얀 골짜기의 물은 반드시 깊숙이 노닐어야 하나니

무엇이 그리 급한지 기러기 울음 능숙하고

어찌나 가벼운지 갈매기도 내려앉지 않는구나

무너진 언덕으로 봄빛 일어나니

작은 배 점점이 흩어지는 듯하구나



만대루의 이름은 두보의 ‘백제성루’에서 따왔다.푸른 병풍을 두른 듯한 산은 마땅히 저녁늦도록 마주해야 할 것이고 ‘취병의만대(翠屛宜晩對)’에서 그 이름을 빌려왔다. 만대루에 앉아 강물과 병산을 보노라니 두보의 시를 누각이름으로 따온 촉촉한 감성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수직으로 곧게 올라간 산은 산 머리에 하얀 절벽을 이고 있고 가을 하늘은 높아만 간다. 산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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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동완 자유기고가
자를 담은 강물은 정물처럼 유유히 흐르고 눈부시게 빛나는 백사장은 강과 서원을 이어주며 더 없이 평화롭다. 늙은 소나무,바람에 몸을 맡긴 억새,지금은 가지만 앙상한 배롱나무가 운치를 더해준다. 기둥 기둥 사이로 보는 풍경이 사진이고 액자다. 7칸 마루이므로 7개의 액자, 7개의 카메라 프레임이 펼쳐진다. 강당인 입교당에서 만대루 너머 보는 경치도 압권이다. 만대루라는 차단된 벽 너머로 보는 병산도 한폭의 그림이다.만대루 앞에 조성된 작은 연못, 광영대도 눈길을 끈다. 주자의 시 〈관서유감〉 ‘하늘과 빛 구름 그림자가 함께 어울려 노는 구나(天光雲影空排徊)’에서 가져왔다. 하늘을 올려보면서 시를 읊으니 가을정취가 둑둑 듣는다. 아름답고 가하다.

만대루에서 본 병산
▲ 만대루 누하주에서 본 입교당
병산서원2
병산서원앞 백사장
만대루 앞 광영지
김동완 자유기고가
서선미 기자 meeyane@kyongbu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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