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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태 전 검찰총장

王氏作東蕃 (왕씨작동번·왕씨가 동쪽에 나라를 세워)
維持五百年 (유지오백년·오백 년 세월을 유지했네)
衰微終失道 (쇠미종실도·쇠약해져 마침내 도를 잃었으니)
興廢實關天 (흥폐실관천·흥망이 실로 하늘에 달려 있구나)
慘澹城猶是 (참담성유시·성은 참담한 채 여전히 있는데)
繁華國已遷 (번화국이천·번화한 나라는 이미 바뀌었네)
我來增歎息 (아래증탄식·내 와서 보니 탄식만 더해지고)
喬木帶寒烟 (교목대한연·교목엔 쓸쓸한 연기만이 감돈다)

이 시는 명 태조의 명을 받아 지은 응제시 24수 중 첫수로 외교시(外交詩)의 백미로 평가받는다.

왕씨가 나라를 세워 500년이나 갔지만, 마침내 도를 잃고 쇠약해져 황량한 성곽만 남긴 채 나라가 바뀌었다. 민심이 곧 천심이니 흥망은 민심이 쥐고 있는 것이다. 이런 민심을 제대로 받들지 못하여 망한 고려의 도읍을 막상 와서 보니 탄식만 나온다. 나라의 동량들은 다 무엇을 했는지, 흥망과 무관한 숲 속에서마저 쓸쓸한 기운이 흘러나오는 것 같다. 자연도 이러한데 사람들의 감회야 어떠하리. 망한 나라의 처지를 빌려 지도자, 공직자의 자세와 분발을 촉구하고 있다.


권근은 고려 말에서 조선 초의 문신이자 성리학자로 자는 가원(可遠), 호는 양촌(陽村)이다.

양촌은 성균시를 거쳐 이듬해 문과에 급제하여 춘추관 검열, 성균관 직강, 예문관 응교, 지공거 등을 지냈다. 공민왕이 죽자 정몽주, 정도전 등과 함께 원나라를 멀리하고 명나라를 가까이 할것을 주장했다.

조선 태조 2년(1393)에 태조의 부름을 받고 계룡산 행재소로 달려가 새 왕조의 창업을 칭송하는 노래를 지어 올렸으나 뒷사람으로부터 곡필(曲筆)이라는 평을 면치 못했다. 명나라와 표전 문제(명나라에 보낸 외교 문서 속 표현이 불경스럽다고 트집을 잡아 일어난 문제)가 발생하자 명나라로 가서 외교적 사명을 완수하였으며, 명 태조의 명을 받아 응제시(應製時) 24수를 지어 중국에까지 문명을 떨쳤다.

그는 경학과 문학을 함께 연마하였으며 이색을 스승으로 모시고 그 문하의 정몽주, 이숭인 등 당대의 석학들과 교유하면서 성리학 연구에 정진하여 고려 말의 학풍을 일신하고 이를 새 왕조로 계승시키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왕명으로 하륜 등과 함께 ‘동국사략’을 편찬하였고, ‘양촌집’· ‘오경천견록’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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