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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가] 34. 김천 연안 이씨 정양공파

가례 해설서 '가례증해' 편찬 등 예를 중시하는 가풍

박용기 기자 ygpark@kyongbuk.com 등록일 2016년11월06일 18시46분  
▲ 정양공의 신위가 모셔진 불천위 사당
김천시 구성면 일대에 분포하고 있는 연안 이 씨는 정양공 이숙기를 현조로 하는 정양공파와 충간공 이숭원을 현조로 하는 충간공파로 갈라진다.

원래 연안 이 씨는 지금의 서울시 중구 필동 일대를 기반으로 세거해왔으나, 1400년 무렵 연성부원군 이말정이 김천시 구성면 지품 마을에 터를 잡으면서 김천지역에 세거하기 시작했다.

이후 홍수로 인해 감천이 범람하자 거창의 못질로 옮겨갔다가 다시 지품 마을로 돌아왔다.

이말정의 후손들은 지품 마을의 인근으로 점차 확산해 갔는데, 특히 황계천을 사이에 둔 상원리와 상좌원리에 밀집해 있다.

그중에서도 상원리에는 정양공파 후손들이, 상좌원리에는 충간공파 후손들이 터를 잡았다.



△연안 이 씨 정양공 종가(宗家)의 역사

연안 이 씨 상원리 입향은 이말정의 손자이며 정양공 이숙기의 차남인 이세칙과 그의 아들 이인석에 의해 이루어졌다.

정양공 이숙기가 세상을 떠나자 장남인 이세범은 혈손을 두지 못해 임금이 특별히 “불천위 제사를 받들되 혈손 봉사하라”는 교시를 내려 차남인 이세칙이 불천위 제사와 종통을 이어받게 됐다. 대표적 인물로는 방초 이정복 (1575-1637)과 예학에 정통한 숭례 이윤적(1703-1757), 경호 이의조(1727-1805), 진암 이수호(1744-1796) 등이 있다.

상원리는 조선 시대 전형적인 반촌으로 마을 앞으로 감천이 흐르고 하천 변을 따라 비옥한 평야가 펼쳐져 있다.

또한 마을 뒤편으로 매봉산이 솟아 있다.

연안 이 씨 정양공 종가를 비롯해 관락사(寬樂祠), 방초정(芳草亭), 절부화순씨최씨정려각, 가례증해(家禮增解)와 소학집주증해(小學集註增解) 목판을 보관하는 있는 숭례각(崇禮閣) 등 다수의 유교문화자산이 있다.
방초정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67호로 지정돼 있는 가례증해 목판이 보관돼 있는 숭례각

6.25 전쟁으로 인해 옛 종가의 모습은 남아있지 않으며, 현재 정양공의 18대손인 이철응 (71) 씨가 종가를 지키고 있다.

▲ 연안 이씨 정양공파 종가를 지키고 있는 18대손 이철응 씨


△정양공 이숙기(李淑琦·1429-1489)

연성부원군 평정공 이말정 (1395-1461)의 넷째 아들로 김천시 구성면에서 태어났다.

1453년 25세에 무과에 일등 급제해 훈련원 주부를 지냈다.

1467년 이시애의 난이 일어나자 비장이 되어 남이 장군과 함께 평정에 나서 북청 공방전에서 승리를 거두고 마흘고개에서 이시애를 생포한 공으로 절충장군으로 특진 됐다.

후에 오위도총관이 되어 적개공신 1등에 녹훈됐다.

이어 같은 해 명나라의 원병을 요청받고 나아가 건주위에서 여진족 토벌에 공을 세워 자헌대부가 됐다.

뒤에 주요 내·외직을 두루 거쳐 1471년 순성좌리공신 4등에 녹훈됐다.

이후 영안도(함경도)관찰사, 경상좌도병마절도사, 지중추부사, 형조판서를 거쳐 호조판서를 지냈다. 작고 후 정양공이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며, 종가에는 그 시호 교지가 보관돼 있다.
정양공이라는 시호를 받은 시호교지



△종가의 배출인물

이윤적 (1703-1757)은 자는 건백 호는 숭례로 예학자 경호 이의조의 아버지이다.

도암 이재의 문하에서 예학을 배운 뒤 숭례처사라고 불릴 정도로 예를 중시하는 삶을 보냈다.

그는 주자가례를 널리 보급하기 위해 여러 학자들의 견해를 수집해 우리나라 실정에 부합하는 가례 해설서인 ‘가례증해’의 편찬에 착수했다.

이후 부친의 유업을 이어받은 아들 이의조에 의해 1772년 완성됐다.

이수호(1744-1796)는 자는 양오, 호는 진암 이다. 형인 이수함과 함께 ‘가례증해’를 지은 이의조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이의조로부터 예학을 전수 받은 이수호는 당대 석학인 성담 송환기의 문하에서 경학을 익힐 정도로 학문적으로 두드러진 업적을 남겼다.

그의 대표적 업적 중 ‘소학증해’는 유림의 유학지침서로 널리 이용됐다.

이 외에도 ‘사례류회’, ‘계몽일득’, ‘춘추의견’, ‘곡례의의’ 등의 문집을 남겼다.

이달(1889-1958)은 자는 여회, 호는 야산 또는 문산이다. 5세 때부터 영민함이 향리에 소문났고, 그 후 역학 및 제가서에 달통해 이주역이라고 칭송받았다. 광복 후 대둔산에 들어가 홍범 및 주역을 제자들에게 가르쳤고 홍역학회를 창립해 지금의 한국홍혁학회 및 동방문화진흥회가 학맥을 이어오고 있다.



△종가의 문화유산

좌리공신녹권은 정양공 이숙기가 1471년 좌리공신 4등에 녹훈되면서 받은 것으로, 1 -4등 까지 73명의 공신에게 내려졌던 노비, 병사, 전 등이 기재돼 있다.
좌리공신녹권 일부의 모습

2012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42호로 지정됐다.

현재 정양공과 함께 녹훈된 다른 좌리공신녹권들은 국가 문화재로 지정돼 있어 후손들은 국가지정문화재로의 승격을 신청한 상태다.

관락사는 정양공 이숙기의 신위를 모신 불천위 사당이다. 종택 안채 뒤편에 위치하고 있으며, 입구에 모로문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사당 내부에는 불천위인 이숙기의 신위와 현종손의 4대 조상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

방초정은 방초 이정복이 건립한 것으로, 1625년 감호(방초정 옆 연못) 옆에 정자를 세운 뒤 자신의 호를 따서 ‘방초정’이라 불렀다.

1689년 그의 손자인 송재 이해가 중건했으며, 대홍수로 유실된 것을 1787년 가례증해를 완성한 이의조에 의해 삼중건 됐다.

방초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2층 누각으로 홑처마에 팔작지붕이며, 2층 누각의 중앙에 온돌방을 마련해 사방으로 여닫이문을 달아 두었다.

또한 화강암 장대석 기단 위에는 막돌로 초석을 놓고 온돌방을 받치고 있는 네 기둥 외에는 모두 원주를 세웠다. 방초정에는 38개에 이르는 현판이 걸려있는데, 이들 대부분 방초정을 방문한 묵객들이 지은 시와 글이다, 그중에는 주변의 아름다운 풍경 열 가지를 시로 읊은 ‘방초정 십경’ 이 전하는데, 방초정에서 바라본 구성면의 아름다운 산하와 아름다움을 잘 표현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정양공파의 종가. 6.25 전쟁때 망가져 아쉽게 옛 모습이 남아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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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기 기자

    • 박용기 기자
  • 김천,구미 담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