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시는 정사에 간여할 수 없다. 어기는 자는 참한다” 환관이 황제의 측근인 것을 이용 조정의 정치에 간여, 화란을 일으켜 온 것을 개탄한 명태조 주원장은 환관의 정사 간섭을 불허하는 현판을 궁궐에 내걸었다. 환관의 정치규제가 엄격히 시행돼 오다 6대 황제 영종 때 깨져버렸다.

영종 이후 명나라는 환관이 대권을 독점, 국정을 농단하는 바람에 나라는 환관들에겐 천국, 백성들에게는 지옥이 됐다. 환관정치의 대부는 영종 때 왕진이었다. 교활하고 아첨이 9단인 왕진은 영종을 구워삶아 사례감(司禮監)에 임명됐다. 사례감은 궁정의 모든 예의와 행사를 관장하고 궁궐 안팎의 상소문을 관리하며 대소신료들이 올리는 모든 공문에 대한 황제의 비답을 황제를 대신해서 전하는 역할을 했다.

환관으로서 최상의 자리에 오른 왕진은 그 순간부터 전횡을 일삼기 시작했다. 나라의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인 전지(傳旨)가 황제에게 직접 전달되지 않고 자신의 손을 거친다는 점을 악용, 함부로 자신의 의견을 집어넣었다. 황제의 신임과 총애를 업고 문무백관을 제압, 환관이 명나라 왕조의 대권을 좌지우지 하는 서막을 열었다.

황제가 베푸는 문무백관들의 큰 잔치엔 아무리 황제의 총애를 받는 환관이라도 참석이 금해져 있었지만 왕진은 이 같은 관례를 깨고 조정의 연회에 제멋대로 참석했다. 문무백관들은 모두 나와 절까지 하며 그를 환대했다. 왕진은 자신과 의견이 다른 사람은 철저히 배척, 죄명을 날조해 가혹하게 보복했다.

조정에 들린 지방 관리들이 그에게 뇌물을 바치지 않으면 얼토당토 않은 구실을 붙여 괴롭혔다. 자기 패거리들은 차례차례로 높은 자리에 승진시켰다. 왕진의 전횡과 비리를 탄핵하는 상소문을 올린 신하에게 죄를 뒤집어 씌워 제거했다. 하지만 왕진의 최후는 비참했다. 그의 국정농단과 전횡에 분기탱천한 호위장군 번충의 쇠망치에 맞아 죽었다.

대통령의 최대 정치적 위기와 국정마비 사태를 몰고 온 비선실세 최순실의 국정농단이 왕진 국정농단의 아바타 같다. 왕진의 최후가 오버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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