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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정체성을 말한다] 10. 가야의 첫 황후는 인도 아유타야국 공주 허황옥

다문화의 시조, 연상연하 커플의 원조, 당당한 그녀의 카리스마

정진원 동국대 연구교수 등록일 2016년11월10일 18시46분  
김해 김수로허황옥 릉 안 파사석탑
김해 김수로왕릉 쌍어문양
김해 장유사 장유화상 부도
허황옥을 기다리던 망산도
구지가에 등장하는 아스카 거북바위
1989년 인도에 갔다 돌아올 때 여성 여행자는 출입국 담당자조차 처음 봤다고 하였다. 지금 인도에 가면 인도 사람 다음으로 한국 사람이 많다는 우스개가 있을 정도이다. 우리의 급속한 세계화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화이다. 그런데 그 인도에서 무려 2천 년 전인 서기 48년에 우리나라 가야로 시집온 인도 공주가 있었다. 다문화가족의 원조라 할 것이다.

아유타야국 허황옥, 지금의 김해 지방인 가락국에 나타난 그녀는 남달랐다. 넘치는 카리스마가 우리나라 역대 어떤 개국의 시조와도 견줄 수 없을 만큼 위풍당당하다. 그리고 우리 할머니 세대까지 만연했던 결혼 풍속이었다가 요즘 다시 하나의 트렌드로 급부상하고 있는 연상연하 커플의 시조모이기도 하다. 남편 김수로보다 열 살 연상이니 21세기 현대 커플과 비교해도 절대 손색이 없다.

특히 가락국의 역사는 삼국유사에 유일하다. 그 후손이 신라로 넘어와 삼국통일의 주역이 된 김유신이다. 가야와 신라는 결국 한 나라로 합쳐져 고구려와 백제를 통일했기에 충분한 경북의 정체성이 될 만하다. 그들에 대한 기록을 더듬어 황옥과 수로가 살던 가야라는 나라로 시간여행을 떠나보자.



가락국은 가야라고도 불리는데 삼국유사에는 ‘가락국기’라고 제목을 붙였다. 이 나라의 시조인 김수로왕은 서기 42년 계욕일(삼월 일일 또는 삼월 삼짇날)에 하늘에서 내려와 알에서 태어난다. 그때 부른 ‘거북아 목을 내밀어라’하는 ‘구지가’는 지금도 전하고 목을 움츠린 거북바위는 신기하게도 일본 교토지역 아스카에서 발견된다. 가야와 왜의 관계를 이어줄 다빈치 코드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김수로는 그렇게 태어난 지 열흘 만에 구척장신으로 자란다. 토착세력인 9간들은 그를 왕으로 삼고 수로의 나이 여섯 살 때(48년) 저들의 딸 중에서 배필을 삼고자 했지만, 수로는 내가 하늘의 뜻으로 가야에 내려왔듯이 나에게 맞는 배필도 하늘이 정해 줄 거라며 거절하였다. 이 내용은 신라 혁거세와 알영 탄생에 6촌의 촌장이 개입되는 정황과 비슷하다.

그해 서기 48년 7월 27일, 아유타야국의 공주 허황옥이 기다렸다는 듯이 납신다. 수로는 그의 최측근 유천간(留天干)과 신귀간(神鬼干)을 시켜 그녀 일행을 맞이한다. 궁궐로 바로 안내하려는 그들을 향한 카리스마 허황옥의 일갈이 멋지다.

‘내 어찌 그대들을 처음 보는데 경솔히 따라가리오’ 수로는 부랴부랴 대궐 아래 임시로 천막 영빈관이자 초례청이라 할 허니문 하우스를 만든다. 허황옥의 거침없고 예사롭지 않은 거동 2탄은 망산도 밖 별포 나루에 내려 언덕에 올라가 그녀가 입고 있던 비단 바지를 벗어 산신령에게 폐백을 드리는 퍼포먼스를 펼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해석과 의미는 김해 허씨 종친회 설명에 따르면 인도 처녀가 결혼을 할 때의 풍습이라고 하는 설이 있는데 그것을 왜 산신령에게 폐백으로 드리는가는 과제로 남는다.

그러고 나서 그녀의 신하인 신보와 조광 부부와 노비 20명을 비롯한 금수능라, 금은주옥, 갖은 패물을 가득 들고 수로에게 나아간다. 그야말로 국제적이고 우주적인 인도와 하늘에서 내려온 커플은 둘만이 있게 되자 서로 자기 소개를 한다.

“나는 아유타야국의 공주, 성은 허씨요 이름은 황옥인데 나이는 방년 16세입니다.”

수로보다 10살 많은 연상연하 커플이라기보다, 꼬마 신랑과 이팔청춘 꽃다운 처녀의 만남이 더 어울리는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두 달 전 5월 그러니까 48년 5월에 우리 부모는 같은 날 똑같이 옥황상제의 꿈을 꾸었는데, 상제께서 ‘그대의 딸을 수로와 배필이 되게 하라’는 말씀이 있으셨답니다.”

이 말을 들은 키만 구척장신, 어린 꼬마신랑 수로도 질세라 대꾸한다.

“나는 나면서부터 성스러운 존재, 장가들라는 신하들의 성화에도 그대가 올 것을 알고 있었기에 이렇게 정절을 지키고 있었다오. 공주가 오셔서 아주 행복합니다.”

둘은 이렇게 7월 28일 만나 혼인하고 영빈관 2박 3일의 허니문을 마친다. 그리고 8월 1일 정오 즈음 수로와 황옥은 궁궐에 나란히 입장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정확한 역사적 기록이 또 있을까. 가락국기는 특히 삼국유사 안에서도 정확한 연대기를 자랑한다. 신행을 마치고 궁궐에 들어오는 시간이 그렇게까지 중요한 사안일까. 가야인들의 역사를 대하는 정확한 태도의 일면을 엿볼 수 있는 동시에 그 기록문화 풍습이 지금은 일본에서 찾아지니 이 또한 묘한 일이다.

이제 배필을 얻은 수로는 수신제가(修身齊家)하였으니 치국(治國)할 차례, 나라의 직제개편에 나선다. 신라와 주나라, 한나라를 벤치마킹하여 벼슬의 직제, 법과 제도를 정비하고 수로와 황옥은 함께 애민정치를 베푼다. 이 정치를 허황옥과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이 중요한 키포인트이다. 박혁거세와 알영에 이은 공동 통치체제 또한 신라시조와 유사하다. 특히 수로와 황옥의 다스림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수로가 하늘이면 황옥은 땅, 수로가 해라면 황옥은 달, 수로가 양이라면 황옥은 음’이었다는 것이다. 이 말은 지금까지 남아있는 남존여비나 남성 중심의 상하 관념, 하나는 위대하고 하나는 보잘것없다는 비유가 아니다. 하늘은 땅이라는 경계가 있으므로 비로소 하늘이 될 수 있고, 달이 없으면 해도 그 빛을 비교할 상대가 없어지는 법이다. 그리하여 음양의 이치가 생긴 것이요, 서로의 짝이 있어야 각자를 더욱 빛나게 하는 상생의 역할을 발휘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해석을 뒷받침해주는 증거는 또 있다. 허황옥의 역할은 마치 중국의 하나라를 흥하게 만든 우왕의 부인 도산씨와 같았고, 요임금의 딸들이 순임금과 결혼해 교씨를 흥하게 한 공로와 같다고 하였다. 황옥이 있어 비로소 가야라는 나라가 흥하고 자손을 이어서 가야 왕조가 계승될 수 있었다는 의미이다.

이렇게 여왕 노릇을 잘하던 황옥은 드디어 곰에 대한 태몽을 꾸고 바로 아들 거등공을 낳는다. 가야에서도 단군의 출생처럼 곰토템은 중요했던 모양이다. 하나라 우왕의 아버지 곤도 죽어서 곰이 되었다고 하는 것을 보면 중국과 우리나라에 곰이 상징하는 위상을 가늠할 만하다. 그 후 허황옥은 자녀의 수가 10남 2녀설, 9남설, 7남설 분분하지만 그중 두 아들을 자신의 성인 김해 허씨로 삼아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로 인하여 김수로왕의 후손인 김해 김씨와 김해 허씨는 이성동본, 성은 달라도 한 자손이므로 동성동본과 같이 결혼하지 않는다고 한다. 허황옥의 아들들에 대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중 하나로 일곱 아들이 모두 출가해 성불했다는 지리산 칠불암의 일화도 유명하다.

황옥은 의연하고 당당하게 왕 노릇하며 자식들을 훌륭히 키워낸 후 189년 157세로 세상을 하직하였다. 그러니 황옥의 출생을 계산하면 서기 32년생이다. 사람들은 서거한 황옥을 수로왕이 처음 나타난 구지가의 무대 구지봉에 장사지내고, 자식처럼 사랑했던 백성들은 또 황후를 기려 그녀와 관련된 유적지에 이름을 붙인다.

황후가 배에서 내린 도두마을은 임금님 오신 포구 ‘주포촌(主浦村)’이다. 황후를 뜻하는 ‘후포촌(后浦村)’이 아닌 임금 주(主)에 주목해야 한다. 또 허 황후가 처음 붉은 돛대, 붉은 깃발 펄럭이며 도착한 바닷가는 ‘기출변(旗出邊)’이다. 가야 사람들이 그녀를 얼마나 사랑하고 추앙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증거들이라 할 수 있다.

허황옥이 죽은 후 수로는 세상에 없는 열부의 모습을 보여준다. 왕비 없는 10년 동안 독수공방하며 베개를 안고 눈물로 지새우다 199년 3월 23일 158세로 세상을 떠난다. 나라에서는 부모를 잃은 것처럼 슬퍼하며 1월 3일과 7일, 5월 5일 단오, 8월 5일과 15일 추석에 제사를 지내는데 마지막 9대 왕 구형왕까지 한 번도 끊이지 않았다. 심지어 신라 문무왕은 자신의 어머니 문명왕후가 김유신의 누이동생으로 가야계인 것을 들어 수로왕을 15대 선조라 천명한 후 제사를 지내도록 한다. 이보다 분명한 가야와 신라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기록이 있을까. 또한, 황옥처럼 수로왕을 기리는 행사가 있었는데 그것 모두가 황옥과 관련 있는 ‘가야식 올림픽’의 개막이다.

내용은 매년 7월 29일 황옥이 가야국에 오던 날 마을 사람, 말단공무원, 군인들이 승점(乘岾)에 장막을 치고 음주가무 축제를 벌이는 것이다. 특히 백미는 동쪽과 서쪽으로 건장한 장정들이 두 패로 나뉘어 하는 올림픽 시합인데 다음과 같다.

첫째 망산도(望山島)에서 말 타고 육지를 향해 달리기. 이것은 허황옥의 출현을 수로왕에게 알리는 경기이다. 둘째 배를 띄워 물 위로 밀며 북쪽 고포에 먼저 닿기 시합. 이 경기는 허황옥이 비단 바지를 벗어 폐백드리던 별포로 목란과 계수나무로 노 저어 마중 가는 게임일 것이다. 셋째 가야 신하 유천간과 신귀간이 허 황후 도착 소식을 수로왕에게 알리는 마라톤이다.

2014년부터 부산과 김해에서 ‘허 황후 신행길 축제’가 열리고 있다. 그러나 삼국유사에 이와 같이 구체적인 기록이 있음에도 그것을 재현하는 내용은 안 보인다. 이왕 역사와 문화 전승의 맥을 잇는 축제라면 원전에 충실한 ‘가야 올림픽’을 구현하면 어떨까 제안해본다.

그 밖에도 가락국기에는 숨겨진 다빈치 코드들이 많다. 예를 들면 수로왕의 이름 ‘수릉’과 단오의 우리말인 ‘수릿날’에 ‘수로’왕의 제사를 지내는 것이 그것이다. 수로와 단오의 유래가 겹쳐져 있을 관련성이 높은 것이다.

또한 가락국기에는 자세하게 기록되지 않았지만, 김해와 부산지역에는 허 황후와 수로왕, 허황옥과 함께 왔다는 그의 오라비 장유화상, 불교와 차의 전래 등에 관한 유적지가 많이 남아 있다. 초야를 보냈다는 명월사는 현재 부산의 흥국사로 남아있고, 파사석탑을 싣고 바다를 무사히 건넌 것을 감사하기 위해 지었다는 해은사, 장유화상이 지었다는 김해 신어산 은하사, 장유화상 부도가 남아있는 불모산 장유사와 2대 거등왕이 부모를 위해 지었다는 부은암, 모은암, 수로왕의 다섯째 아들이 지었다는 김해 봉하마을 자은암 등이 그 예이다.

한편 가락국기에서 주의 깊게 살펴야 할 중요한 사실은 불교의 연대기를 훨씬 올려야 할 기록들이 보인다는 것이다. 삼국유사 탑상편 금관성 파사석탑 조에는 공주가 바다를 건너가다 풍랑에 되돌아오니 부왕이 파사석탑을 실어 보내 무사히 도착했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그보다 앞선 43년에는 궁궐터를 정하면서 16 나한이 살 만한 터라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서기 44년경에 왕의 자리를 노리고 나타난 탈해와 수로왕의 겨루기에서도 석가보 등에 보이는 전형적인 불교식 둔갑술 경쟁 이야기가 재현된다.

우리는 372년 고구려 소수림왕 때 불교가 전래됐다는 사실을 금과옥조처럼 여기고 의심치 않고 있다. 그러나 삼국유사 속에는 이처럼 불교 전래를 300여 년 이상 올릴 수 있는 기록들이 편린으로 박혀있다. 이 또한 불교국가 인도 아유타야 공주와의 관계에서 풀어나가야 할 우리 불교 역사의 실마리인 것이다.

▲ 정진원 동국대 연구교수
21세기에도 만나기 쉽지 않은 당찬 소녀 허황옥은 하늘에는 땅이 있어야 하고 해에게는 달이 있어야 완전한 한 쌍이 된다는 사실을 몸소 보여준 수로의 배필이자 남녀평등의 표상이다. 우리는 최근에서야 엄마의 성을 자식의 성으로 물려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2000년 전 삼국유사 속 여인 허황옥에게는 허씨 성을 두 아들에게 물려주는 일은 아주 자연스럽고 타당한 자기의 권리 행사의 일환이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삼국유사는 가락국기조 하나만으로도 세계기록유산이 될 만하다. 가야의 역사가 그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은 지금, 조선왕조실록에 버금가는 가야왕조실록이 수록된 세상에서 유일한 기록유산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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