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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늦가을, 찬바람이 불고 낙엽들이 땅바닥을 뒹굴 때면 옛 생각이 많이 납니다. 따듯한 옷자락을 부여잡고 옛 추억들이 기지개를 켭니다. 어릴 때 동무들과 함께 뛰어놀던 정든 골목길 풍경들도 생각나고, 젊은 날 내 곁을 스쳐 지나갔던 인연의 달콤함 들도 아련함을 더합니다. 그렇지만, 만추(晩秋)의 쓸쓸함을 가장 달래주는 것은 역시 모정(母情)의 추억입니다. 어머니의 따듯한 품은 그 모든 세한(歲寒·매우 심한 한겨울의 추위)을 녹여내는 지상 최대의 발열체입니다. 생각해 보면. 옛날 골목길은 참 춥기도 추웠습니다. 손발과 얼굴이 다 꽁꽁 얼었습니다. 하루 종일 밖에서 놀다 지쳐서 들어오는 여린 몸뚱어리를 꼭 안아주던 어머니, 그 부드러운 ‘포옹의 추억’이 없었다면 가뭄에 콩 나듯이 세상을 안아 주는 저의 알량한 포용심도 아예 있을 수도 없었을 겁니다.

쓸쓸함을 더하는 만추를 맞이해서 모정의 추억과 관련된 이야기 한 토막 전해드리겠습니다. 중국 시인 애청의 서사시 ‘대언하-나의 유모’와 이양하의 수필 ‘나의 어머님’을 비교 분석하고 있는 김윤식 교수의 글입니다. ‘젖어미’에 대한 형언할 수 없는 그리움을 한 사람은 서사시로, 또 한 사람은 에세이로 애절하게 그려내고 있는 것을 아름답게 전하고 있는 글입니다.

‘젖어미’는 젖어머니의 낮춤말인데 그 사전적 의미는 ‘남의 아이에게 그 어머니를 대신하여 일정한 동안 젖을 먹여 키우는 어머니’입니다. 유모의 역할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 기간 동안’ 어머니의 모든 역할을 대신하는 ‘기간제’ 어머니입니다. 그 기간 동안 아이는 젖어미를 친어머니로 알고 자랍니다. 가난하지만 성정이 바르고, 그 무렵 아이를 낳고 젖이 풍부한 아낙을 골라 젖어미를 삼습니다. 젖자식에게는 그 기간이 모정(母情)을 체득하는 초체험 시기가 됩니다. 당연히 젖어미는 진짜를 능가하는 가짜 어머니가 됩니다. 조금 과장하자면, 스스로 가짜이면서 세상 모든 것을 ‘가짜’로 몰아세우고 오직 혼자만 ‘진짜’로 살아남는, 오직 하나뿐인 진실인, 불패의 어머니가 됩니다. 보통 친어머니가 건강이 나빠 직접 키울 수 없는 상황에서나, 아니면 어떤 주술적인 믿음으로 인해 가족과 떨어져 성장할 수밖에 없었던 젖자식들이었으므로, 친어머니를 대신해 지극정성으로 자신을 키워준 젖어미는 이미 그 자체로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하는 ‘하나뿐인’ 어머니가 될 수밖에 없는 형편입니다. 그들에게는 젖어미가 곧 최초의 어머니이며 동시에 영원한 어머니였던 것입니다. 누추한 살림살이였지만 언제나 젖자식에게는 헌신적이었던, 그 안락하고 완전했던 최초의 우주가 가짜였다는 것을 인정하라는 것은 젖자식에게는 여간 큰 고통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젖자식이 귀환하는 날은 온 동네의 볼거리였다는 말도 그래서 나왔습니다. 당일로 모자 이별이 성수(成遂)되지 못해 며칠씩 그 눈물의 행사가 연장되는 경우도 허다했답니다. 그런 연유로 젖어미 젖아비가 돌아가시면 그 젖자식은 엄연한 상주로 상복을 입습니다. 성씨가 달라도 엄연히 상주의 자격으로 조문객을 받습니다. 그 젖어미를 소재로 쓴 글들이 중국 시인 애청의 ‘대언하-나의 유모’와 이양하의 ‘나의 어머님’이고 그 글들에 숨겨진 내밀스런 문학적 원리들을 탐구하고 있는 것이 김윤식 교수의 ‘운명과 형식’이라는 글입니다.

쓸쓸한 늦가을, 문득 젖어미처럼 짧은 생애를 나누고 가신 어머니를 생각합니다. 제 마음의 텃밭에 어떤 ‘원천적인 외로움이나 그리움’의 씨앗을 뿌리고 간 바로 그분입니다. 그 ‘젖어미의 추억’이 오늘도 저의 불미(不美)하고 외로운 글쓰기를 따뜻하게 품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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