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진이씨 집성촌' 홈실마을, 인재 배출의 산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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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들 성주를 ‘성씨의 고장’이라 한다. 전국에서도 잘 찾아볼 수 없는 현상으로 성주 본향의 성씨가 많기에 붙여진 명칭이다. 그 중에서도 이(李)씨의 본관이 여섯이나 있는 것은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독특한 현상이다. 성주육이(星州六李)라는 명칭도 여기에서 유래했다. 성주육이는 성주를 본관으로 하는 여섯이씨로, 광평이씨, 경산이씨, 벽진이씨, 성주이씨, 성산이씨, 가리이씨를 말한다. 가리이씨의 가리는 옛 성주의 속현이다. 이러한 성씨의 전통은 오늘날에도 그대로 이어져 성주 관내에는 성주육이의 집성촌 또한 적지않게 남아 있다. 특히 벽진이씨의 집성촌인 초전면 월곡리의 홈실마을은 그러한 마을들 중에서도 대표적인 마을이다.


◇ 원나라 황제가 지어준 마을 이름

홈실마을 전경

성주군 초전면 월곡리는 별뫼(星山 715m)와 달뫼(月山 611m)와 봉양산(588m)의 삼각지 안에 있으며, 산골의 달밭마을과 월곡 조수지 위쪽의 홈실마을로 구성되어 있는데, 벽진이씨의 집성촌인 홈실마을은 그 지명의 유래가 멀리 중국의 원나라와 연결되어 있다.

벽진이씨의 홈실 입향조는 시조인 이총언의 7세손인 광록대부(光祿大夫) 이방화(李芳華)인데, 그의 후손으로 고려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의 3조(朝)에 걸쳐 벼슬한 산화(山花) 이견간(李堅幹)이 1317년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당시의 원나라 황제인 순제(順帝)에게 그의 명성이 알려져 만나게 되었는데, 그가 살고 있는 곳을 물어 호음곡(好音谷)이라 하여 그림을 그려 보이니 순제가 보고 마을에 물이 적겠다고 걸수산(乞水山)의 물을 당겨 오기 위하여 명(椧, 나무로 홈통을 만들어 물을 당긴다는 뜻의 글자가 처음 만들어 짐)자를 지어서 마을이름으로 정해 주었다고 한다.

△ 서거정(徐居正)이 ‘동시선(東詩選)’에서 동방(東方)에서 두견(杜鵑)을 읊은 시(詩) 사절(四絶) 중 가장 뛰어나다는 극찬을 아끼지 않았던 산화 이견간의 두견시(杜鵑詩)



사신 가다가 관동에서 두견새 울음을 듣고


객관에서 꺼진 등에 불 댕기니 한 점의 불뿐인데

꽃바람을 쐬게 하니 중보다 더 얌전히 너울거린다.

창밖에 두견새 밤이 다하도록 울어 예니

두견새 울음 산화(山花) 속에 쏟아지는 꽃잎들 몇 겹이나 쌓일꼬



△ 성주의 다섯 곳 이름난 터의 으뜸

홈실에 대해서는 성주의 다섯 곳 이름난 터와 관련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기도 하다. 대구의 대명동이 유래하게된 계기를 만들어준 명나라의 풍수가였던 두사충(杜思忠)이 임진왜란으로 조선에 파견된 명나라 장수 이여송을 따라 왔다가 대구에 살면서 성주 지역을 둘러보고 다섯 곳을 풍수지리상 명당으로 지목하였는데, 그 중의 한 곳이 바로 홈실마을이다. 그가 지목한 다섯 곳은 홈실과 수륜면 윤동마을, 대가면 칠봉리 사도실, 선남면 오도리 오도마을, 칠곡군 지천면 창평리 웃갓(이곳은 인조 이전까지 성주목의 속현인 팔거현이었다) 등인데, 이설은 있으나 두사충이 홈실을 첫 번째 명당으로 꼽았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홈실마을은 조선시대만이 아니라 근현대에 이르러 많은 인물들이 배출되었다.

◇ 문곡서원과 완정고택

완정고택


문곡서원은 산화 이견간을 향사하기 위해 1750년(영조 26)에 마을 내에 세워진 서원으로서 1871년(고종 8)에 훼철되어 문곡서당으로 보존하여 오던 중 1989년에 복원하였으며, 1996년 봄에 유림의 정론으로 고려 충혜왕 때 수문전대제학(修文殿大提學)을 지낸 이대(李玳)와 조선시대 형조참판을 지낸 이군상(李君常)을 배향(配享)하고 있으며, 지금도 매년 춘추에 향사를 올리고 있다.

마을 안쪽에 위치한 완정고택(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63호)은 조선중기 인물인 완석정(浣石亭) 이언영(李彦英)의 종택이다. 이언영은 1603년(선조 36) 식년문과에 장원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으며, 1613년(광해군 5)에 정온(鄭蘊)이 영창대군의 원통한 죽음을 항의하다 역적으로 몰리자 이를 변호하다가 관직에서 물러났다. 인조반정으로 다시 관직에 나아가 승지를 거쳐 청주·선산·밀양부사를 역임했고 저서로 ‘완정집(浣亭集)’이 남아 있다.

△ 홈실출신 인물들

홈실마을이 배출한 인물들은 수십명의 박사가 나왔다라고 알려질 만큼 많 이 배출되어 여러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하였다. 먼저 제서(濟西) 이정기(李貞基)는 도학으로 널리 알려졌으며, 일제강점기 유림단독립운동(속칭 파리장서 사건) 등에 참가하는 등 독립운동에 헌신하여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훈한 이정기(李定基)가 있다.

현대이후에는 교육계에 이인기 전 영남대학교 총장, 이완기 전 초전초등학교장, 이완순 전 벽진초등학교장, 이태순 전 대구공고 교장, 이인순 전 대구대 교수, 이문수 전 대구대 대학원장, 이재순 전 건국대 교수, 이우붕 경북대 교수, 이선하 공주대 교수 등이 있다. 또한 정·관계에는 11대 국회의원을 지낸 이윤기, 정보통신부 장관과 KT회장을 역임한 이석채, 정보대학원장을 지낸 이외수, 주케냐대사를 지낸 이석조, 중소기업청장을 지낸 이석영, 서울 농업기술센터소장을 지낸 이석우, 용산구총무국장을 지낸 이종건 등이 있다. 법조계에도 이우정, 이현숙, 이호승 등의 마을 출신 인사들이 활약하고 있으며, 재계·금융계에 ㈜태일자동제어 이종웅 대표, 국민은행 부행장을 지낸 이달수, 이상윤 외환은행 지점장, 이남수 기업은행지점장 등이 있다. 도움말=박재관 성주군 학예사

문곡서원 강당
문곡서원 사당 현덕사
권오항 기자
권오항 기자 koh@kyongbuk.com

고령, 성주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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