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모난 연못에 네모난 섬…인위를 버리고 자연을 채우다

▲ 선교장 찻집에서 본 활래정
강릉 선교장은 조선 후기 명문가인 강릉이씨 고택이다. 효령대군 11대손인 이내번이 염전을 경영해 번 돈으로 지었다. 예전에는 경포호수를 가로질러 배로 다리를 만들어 건넜다 하여 선교장이라 했다. 그 때의 호수는 지금 논이 됐다. 뽕밭이 푸른 바다가 됐다더니 여기는 푸른 호수가 논으로 변했다. 그저 선교장의 택호를 통해 옛일을 더듬을 뿐이다.


선교장은 99칸짜리 사대부가 상류주택의 전형이다. 안채 주옥을 시작으로 동별당 서별당 연지당 외별단 사랑채 중랑채 행랑채 사당이 지어졌고 큰 대문을 비롯한 12대문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300년 동안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돼 있어 국가지정 중요민속문화자료 제5호로 지정됐다.

활래정과 활래정 뒤로 보이는 선교장.
활래정은 선교장에 딸린 정자로 1816년(순조 16년) 이후(李后)가 지었다. 나지막한 산과 그림 같은 노송이 병풍처럼 정자 뒤를 두르고 정자 앞에는 인공호수를 파 연꽃을 심었다. 연못 주변으로는 백일홍을 심어 여름이 아름다운 곳이다. 꽃 다 진 가을에 찾은 연당은 더 없이 쓸쓸하다. 연잎은 시들었고 연밥과 줄기는 뼈대를 드러낸 채 겨울을 기다리고 있다. 활래정은 창덕궁 후원의 부용정을 닮았다. 네모진 연못 안에 작은 섬을 만들고 소나무를 심었다. ‘ㄱ’자 형태의 정자는 돌기둥으로 받혀져 있는데 네 개의 돌기둥 연못에 발을 담그고 있어 정자 위에 오르면 자연스레 물 속에 들어앉은 흥취가 나기도 하고 물위에 떠 있는 느낌이 나기도 한다. 선비가 발을 씻는 모습 같기도 하다. 반면 부용정은 네모진 연못에 둥근 섬을 만들어 ‘방지원도형’인데 비해 활래정은 독특하게 네모난 연못에 네모난 섬을 만들었다.

정자를 창건한 이후(李后)는 과거에 응시했다가 낙방한 뒤 중앙정계 출입을 끊고 초야에 묻혀 은일지사로 지냈다. 여느 조선의 유학자와 마찬가지로 주자를 흠모했다. 주자처럼 은둔하는 삶을 최고의 미덕으로 여겼다. 활래정 현판은 주자의 시 ‘관서유감’에서 집자했다.

조그만 네모 연못에 거울처럼 열리니 半畝方塘一鑑開
하늘빛과 구름그림자가 그 안에 떠 있네 天光雲影共徘徊
무엇일까 이 연못이 이리 맑은 까닭은 問渠那得淸如許
샘이 있어 맑은 물이 흘러오기 때문이지 爲有源頭活水來

해강 김규진이 쓴 활래정 현판
‘샘이 있어 맑은 물이 흘러오기 때문이지(爲有源頭活水來)’에서 ‘활(活)’자와 ‘래(來)’자를 뽑아서 썼다. 조선의 유학자들에게는 주자가 선비의 이상향이었다. 주자의 ‘무이구곡’을 본따 퇴계이황은 ‘도산구곡’을, 율곡 이이 ‘고산구곡’을, 우암 송시열은 ‘화양구곡’을 경영했다. 특히 정자나 정사, 대에 이름을 붙이면서 ‘관서유감’을 차용하기를 즐겼다. 주로 이 시 중에서 두 번 째 구절 ‘하늘빛과 구름그림자가 그 안에 떠 있네(天光雲影共徘徊)’의 ‘천광’ ‘운영’ ‘영광’ 등을 집자했으나 활래정처럼 넷째 시구에서 집자하는 경우는 유일하다.

활래정은 끊임없이 활수가 들어오는 정자라는 뜻이다. 실제로 정자 앞 연못에는 태장봉으로부터 끊임없이 맑은 물이 흘러들어 온다. 거울처럼 맑은 연못 물에 하늘의 구름과 정자가 함께 비쳐 ‘하늘 빛과 구름 그림자가 그 안에 떠 있다’는 주자의 시 풍경을 그대로 연출하고 있다.

운석 조인영(1782 ~1850)이 쓴 기문에 그 뜻이 어느 정도 드러난다. “ 금년 가을 백겸이 와서 말했다.‘선교장 옆에 둑을 쌓아 물을 가두어 전당연을 심고 그 위에 정자를 지은 뒤 주자의 시 구절인 ‘활수래’에서 ‘활래’를 가져와 편액으로 이름 하였네.아침 저녁으로 산책하며 스스로 즐거워하는데 내가 사는 곳은 그대고 감상한 적이 있으니 나를 위해 기문을 짓지 않겠는가‘ 내가 말했다. ’‘ 주자는 마음을 물에 비유하였는데 물은 본디 허경일세. 지금 그대는 참으로 이렇게 맑고 잔잔한 물을 활력있는 물이라 하는가. 물이라 이름 붙인 것은 모두 활력 있는 것일세.(중략) 여기 이 정자에 자취를 거두고 기심을 없애 자기 마음에 활력을 부치기를 원한 것이라네 그러니 마음에 맞는 곳이 멀리 있지 않으며 작은 연못의 조그만 물도 호수와 바다가 될 수 있다네”

활래정은 네모난 연못에 네모난 섬을 조성한 독특한 형태를 띠고 있다.
활래정의 독창성은 ‘관서유감’에서의 집자와 네모난 연못 속의 네모난 섬 외에도 곳곳에 감춰져 있다. 방과 마루를 연결하는 복도 옆에 다실을 둔 것도 독특하다. 방과 마루 사이에 다실을 배치함으로써 겨울에 사용하는 온돌방과 여름에 쓰는 누마루 어느 곳이라도 차를 마시기 편한 구조로 돼 있다. 활래정은 안에서 바라보는 경치는 신선 놀음이다. 문을 열어두면 뒤쪽에서는 울긋불긋 가을산이 정자 안으로 확 밀려든다. 추사 김정희가 이곳에 들러 ‘홍엽산거(紅葉山居)’라는 작품을 남긴 뜻을 알겠다. ‘붉은 잎으로 산에 깃들어 살겠다’는 뜻이다. 앞으로는 쇠락한 연꽃이 물결처럼 펼쳐진다. 늦은 가을에 정자에 앉아 심등 하나씩 켜고 소망 밝히는 한 여름의 연꽃을 마음속에 불러내기란 그렇게 어렵지 않다.

여름 한때 화려했던 연당의 연꽃.
활래정으로 들어가는 작은 문의 이름은 ‘월하문月下門’이다. 월하문 양쪽 기둥에는 주련이 걸려있는데 당나라 시인 가도의 시 ‘제이응유거(題李凝幽居)’에서 빌려왔다.한가히 살아 더불어사는 이웃도 드물고/ 풀숲 오솔길은 황폐한 마당으로 들어간다./새들은 연못가 나무에서 자고/스님은 달 아래 문을 두드린다.

‘새는 못가의 나무에서 잠자고(鳥宿池邊樹)’ ‘스님은 달 아래 문을 두드린다(僧敲月下門)’. 월하문 현판은 건 의미는 ‘달이 뜨는 늦은 밤이라도 이곳을 찾았다면 월하문을 두드려라’라는 뜻이다. 이 시의 그 유명한 ‘퇴고(推敲)’의 일화를 남긴 시다. 시인 가도는 ‘승고월하문(僧敲月下門)’에서 ‘두드린다(敲)’가 좋을지 ‘민다(推)’가 좋을지 고민하며 당나귀를 타고 가다가 높은 벼슬 자리를 하던 당대의 시인 한유와 충돌했다. 가도의 사연을 들은 한유는 ‘민다’보다 ‘두드린다’가 낫겠다고 하였고 그래서 시는 두드린다가 됐다. 글자 한자를 가르쳐서 스승이 되는 경우를 ‘일자사(一字師)’ 라고 하는데 이 경우다.

활래정 출입문인 월하문
선교장은 자체의 풍광과 관동팔경 때문에 많은 시인 묵객이 드나들었다. 추사 김정희, 흥선대원군 이하응도 이곳을 찾았다. 하도 사람이 많이 들락거리다 보니 행랑채에는 서화를 표구하는 사람과 환자를 돌보는 의원까지 상주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활래정에는 모두 6개의 ‘활래정’ 편액이 있다. 마치 활래정 편액 콘테스트 같다. 월하문을 통과했을 때 정면에 보이는 편액은 정병조(1863~1933)의 글씨다. 흰 바탕에 금색 행서다. 정병조는 동궁 시종관을 지낸 인물로 시문과 서예가 탁월했고 행서와 초서가 뛰어났다. 그는 명성왕후 시해사건때 음모를 알고도 방관했다는 죄로 제주도로 유배 갔다가 특사로 풀려났다. 그 옆에 하얀 바탕에 옅은 초록색 예서체는 해강 김규진 (1868~1933)의 글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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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사진 김동완 자유기고가
정자의 모퉁이를 돌아가면 합죽선 모양의 편액이 걸려있는데 둘 다 김규진의 작품이다. 김규진은 18세에 중국에 건너가 공부를 했다. 대필서에 뛰어났으며 창덕궁 희정당 벽화인 ‘내금강만물초승경’, ‘ 해금강총석정절경’ 같은 채색화를 그렸다.연못쪽 처마에도 세 개의 ‘활래정’ 편액이 걸려있는데 성당 김돈희와 성재 김태석의 글씨이고 규원 정병조의 글씨가 하나 더 있다. 추사 김정희는 삼십 세 전후에 금강산을 유람하였는데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선교장에 들어 ‘홍엽산거’라는 현판을 썼다. 흥선대원군은 추사 김정희의 제자다. 그는 예서가 뛰어나 스승으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대원군은 이회숙과 친하게 지냈는데 이회숙이 요청으로 ‘오재당(午在堂)’이라는 편액을 썼다. 선교당 당호의 사당이다. 또 대련 작품을 남겼다. 추사의 편액과 흥선대원군의 대련은 선교장 민속박물관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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