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진태 전 검찰총장

請看千石鐘 (청간천석종·청컨대 천 석 종을 보라)
非大扣無聲 (비대구무성·크게 치지 않으면 소리가 나지 않는다)
爭似頭流山 (쟁사두류산·어찌하면 두류산처럼)
天鳴猶不鳴 (천명유불명·하늘이 울려도 오히려 울지 않을 수 있을까)

이 시는 덕산 계정의 기둥에 쓴 것으로 남명의 높은 기상을 스스로 보여 준다. 일 석이 120근이니 천 석이면 12만 근이다. 12만 근이나 되는 대종은 웬만하게 쳐서는 소리가 나지 않는다. 그런데 여기서 더 나아가 저 지리산처럼 하늘이 때려도 울지 않고 버틸 수 있길 기대하고 있다. 천 길(만 길) 절벽 위에 서 있는 기상(有壁立千?(萬?)之氣)을 가졌다는 말이 빈말이 아님을 보여 준다.


조식은 조선 시대의 학자로 자는 건중(楗仲), 호는 남명(南冥)이다.

그는 부친이 이조정랑 등을 지내면서 가문이 일어서는가 했지만, 곧 숙부가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목숨을 잃고 뒤이어 부친마저 관직을 삭탈당하면서 벼슬길에 회의를 품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대장부가 벼슬길에 나아 가서는 아무 하는 일이 없고 초야에 묻혀서는 아무런 지조도 지키지 않는다면 뜻을 세우고 학문을 닦아 장차 무엇을 하려고 하는가’라는 글에 충격을 받아 출세보다는 유학의 본령을 탐구하는 쪽으로 마음을 정했다.

‘군자는 경(敬)으로써 안을 곧게 하고 의(義)로써 바깥을 바르게 한다’라는 주역의 말을 좌우명으로 삼아 경과 의를 세워 스스로 도야하고 경계하면서 후진 양성에 힘썼다. 조정에서 여러 차례 벼슬을 내렸지만 사양했다.

그는 포의로 지내면서 “대비(문정왕후)는 구중궁궐의 한 과부에 불과하고 국왕(명종)은 돌아가신 왕의 한 고아일 뿐이니, 천 가지 백 가지나 되는 하늘의 재앙과 억만 가지의 민심을 어떻게 감당하며(何以當之) 어떻게 수습하시겠습니까(何以收之耶)”라는 상상하기 어려운 표현으로 문란한 통치에대하여 시정을 요구한 이른바 ‘단성소’를 올리기도 하였으며 이러한 활동 등으로 재야 사림의 영수로서 우뚝 섰다.

남명은 퇴계가 세상을 떠났다는 말을 듣고 눈물을 흘리면서 “같은 해에 태어나고 살기도 같은 경상도에 살면서 70년을 두고 서로 만나지 못했으니 어찌 운명이 아니겠는가. 나도 곧 가게 될 것이다”라고 했으며, 또 퇴계가 죽으면서 “내 비석에 처사라고만 쓰라”라는 유언을 했다는 말을 듣고는 “퇴계가 할 벼슬은 다 하고 처사라니 평생 동안 출사하지 아니한 나도 이 칭호를 감당하기 어렵거늘”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남명은 퇴계가 떠난 그다음 해에 세상을 하직했으니 참으로 두 사람의 경계가 남다르다.

남명은 후일 그의 상징이 된 성성자(惺惺子)라는 방울을 차고 다니면서 타락한 권력을 질타하고 무기력한 지식인 사회에 경종을 울린, 이른바 선비 정신을 실천한 인물이다.

그의 실천적 학풍은 제자들에게 그대로 계승되어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 활약한 이가 많았다.

정인홍 사건 등으로 남명 쪽에 선 이들은 큰 타격을 받았지만 국가적 위기가 있을 때마다 민본을 바탕으로 한 남명의 정신은 면면히 이어져 왔다. 자족과 은일이 가능한 지리산이 현실 비판적 내지 체제 도전적 정신형성에 나름대로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정조 역시 “영남에서 절의(節義) 있는 선비가 배출된 것은 실로 이 한 사람의 힘 때문이니 후세에 어찌 중도의 선비(中行之士)를 얻을 수 있겠는가. 이런 사람은 또한 얻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라고 평했다(‘일득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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