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회씨, 제3회 경북일보 문학대전

입원하던 날 아침, 마당을 나서는데 쿰쿰한 냄새가 코끝에 들이쳤다. 순간 구역질이 솟았다. 마당 어귀의 채반에 널어 둔 껍질 깐 토란 줄기에서 나는 냄새였다. 매일 채반을 안으로 들였다 내기가 힘들어 바깥에 그냥 두었다. 줄기가 점차 갈색으로 변하더니 늘어진 고무줄처럼 새들해졌다. 그러다가 비를 맞았는지 심이 무르고 곰팡이가 슬었나 보았다.

자꾸 구역질이 난다. 손으로 입을 막아 보지만 토물은 없다. 먹은 게 없으니 나올 것도 없겠지. 위장이 뒤틀리고 가슴도 갑갑하다. 잘린 나무둥치처럼 뻣뻣해진 몸이 통증으로 감싸인다. 숨을 깊게 쉬어 보지만 통증은 그리 쉬 물러갈 조짐이 없다. 이빨을 깨물며 베개에 머리를 깊게 뉜다. 속 커버가 비닐이어서인지 뻣뻣한 느낌이다. 견뎌야 한다. 진통제를 맞은 지 채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았다. 시큼한 냄새가 코를 찌르던 야쿠르트를 상두대에 올린다.

‘순대할배가 뭔 일이래요. 어쩌자고 자꾸 주는지요. 엄청 간식거리를 아끼거든요. 흩어 놓은 것들을 정리해 주려해도 손도 못 대게 하면서 라사 씨한테는 주거든요.’ 노인의 불필요한 친절 때문에 내가 구역질을 한다고 여기는지 간병하는 여사가 불만을 터뜨린다. ‘괜찮아요. 내가 냄새 때문에 힘들어 하는지 모르나 봐요.’노인을 위해 변명을 한다. 그저 나누어 주고 싶었으리라. 나를 골탕 먹이려는 의도라곤 털끝만치도 없는 그다. 나는 위장을 다독이기 위해 물을 한 모금 마신다.

간병하는 여사는 성이 왕 이라했다. 왕 여사는 노인들에게 별명을 잘 붙인다. 순대 좋아한다고 ‘순대할배’, 머리칼이 반쯤 없다고 ‘바가지할배’, 종일 하품 한다고 ‘하품할매’, 남의 먹을 것을 훔쳐 먹는다고 ‘바퀴벌레할매’라 한다.

입원 하던 날, 휠체어에 실려 병동에 들어섰다. 누구를 향하는지 대상도 없이 혼자서 새실새실 웃고 있는 할아버지가 있었다. 나는 아, 하고 소리를 낼 뻔했다. 외겹의 깊고 큰 눈, 높고 둥근 콧날, 긴 인중이 남편을 얼마나 닮았던지.

순대할배는 사람들을 자기식으로 불렀다. 간호사를 아주머니로, 타 환우들을 자기가 기억하는 다른 사람들인 조카, 길순, 영희 등으로 마구 불렀다. 숨소리에 쇳소리가 섞여 신경을 곤두서게 만들기도 했다. 천식 때문이다. 간간이 큰 소리를 내서 힘껏 기침을 하는 통에 겨우 든 잠이 깬 적도 많다. 특이한 습관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양 윗옷 끝을 묶었다 풀었다 반복하며 손장난을 하는 것이다. 아마도 예전에 그는 꽤나 장난이 심한 소년이었을 것이다. 칠 년간이나 마주 보며 때론 웃게 했고 때론 얼굴을 찌푸리게 하며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깨우치게 했으니, 그가 죄인이 되게 둘 수는 없는 일이다.

남편은 큰놈이 중학교 입학할 무렵 교통사고로 한마디 간다는 말도 없이 내 곁을 떠났다. 그는 참으로 무정하고 무책임한 사람이었다. 그에 대한 허전함이나 그리움 따위는 내게는 너무 호사스런 감정이었다. 아들 녀석들은 너무 어렸고 한창 돈이 들어갈 시기였다. 나는 오로지 먹고 사는 짓을 위해 죽을힘을 다했다. 여자의 몸으로 남자의 몫을 해낸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학창시절 칭찬받던 글쓰기 능력을 되살려 학습지 교사를 시작했다. 차가 없었기에 집집마다 밤늦게까지 가방을 들고 다녔다. 먼 거리를 다녀온 날은 다리가 굳어 발을 내딛기 힘들었다. 다리의 피로를 풀 틈도 없이 매일을 낮에는 집안일을 해야 했고 저녁 무렵이면 교재용 책이 든 무거운 가방을 들고 이곳저곳을 다녀야 했다.

큰놈이 고등학교 3학년, 작은놈이 고등학교 1학년인 어느 날 거실에 앉았는데 발바닥에 미약한 둔감을 느꼈다. 그럴 때도 있으려니 싶었다. 팔이 아주 조금씩 떨렸지만 살기에 불편하지는 않았다. 그냥 지나면 언젠가는 나아질 것이라 여겼다. 아니 나를 돌아볼 여유 같은 건 없었다. 먹고 살기도 힘든 내게 병원이란 사치였으니까. 대여섯 핸가 지났을 무렵 길을 가다가 엎어지고 말았다. 손이 떨리고 발을 제대로 디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때서야 몸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형외과에 갔다. 노인성 파키슨병입니다. 이미 상당히 진행됐습니다. 의사는 무덤덤한 얼굴로 말했다. 병원 문을 나서는데 살아온 날들이 비눗방울처럼 공중으로 떠오르다가 한 순간에 터졌다. 그날, 가슴은 한쪽이 뻥 뚫려 있었고 시야에 펼쳐진 하늘은 엄청난 억울함을 겪고 있는 듯 금방 울음을 터뜨릴 듯 회색의 얼굴을 하고 잔뜩 찌푸려 있었다. 오진은 흔히 있는 일 아닌가. 웃어야 할 때 울고 울어야 할 때 웃는 심한 정서적 부조화를 겪으며 만약 나를 이토록 막다른 골목으로 모는 자가 있다면 그를 용서치 않으리라, 다짐했다. 아니 기도하고 기도 했다. 지금 난 나를 위해 병원을 드나들 정도로 한가하지 않다. 내생에 가장 중대한 일이 남아있다. 아이들을 출가 시켜야 한다. 나를 도와 달라고 높은 하늘에, 스치는 바람에 애원했다. 그러다가 삶은 본래 고통인 것이라고 거리를 활보하는 사람도, 즐거움에 겨워 마냥 깔깔거리는 사람도 모두는 죽음으로 가고 있는 중이라고, 나는 그 과정을 조금 불편하게 가고 있는 것뿐이라 억지 같은 위로를 하며 버텼다.

병은 점차 심해졌다. 발을 디딜 때마다 미약한 통증이 있더니 서서히 다리가 굳어가서 걷는 게 힘들어졌다. 두 아들은 직장 따라 다른 도시에서 살고 있는데다 며느리들조차 어린 손자들을 한창 돌보아야 할 시기였다. 나는 벽을 짚으며 걸었고 앉아서 다리를 끌며 움직였다. 사람이 없는 집안은 끝도 없는 벌판이었다. 옷 갈아입는 것, 화장실 드나드는 것, 때도 없이 몰려드는 허기에 무언가로 배를 채워야하는 것, 그 모든 것이 서러움이었다. 해가 지면 눈물이 가슴을 적셨고, 어둠은 나를 삼키려 해파리처럼 손을 뻗었다. 불면의 연속이었다. 장애인 복지에서 방문하는 간병 서비스는 하루 4시간이 고작이었다. 발과 다리에 국한하던 통증은 상부로 올라왔고, 세기는 심해졌고 횟수는 잦아졌다. 더 이상 버틸 여력이 없었다. 아들 내외들은 서로 자기 집으로 가자고 했지만 나는 그들을 설득했다. 의료진이 있고 같은 처지의 노인들이 있는 병원으로 가고 싶다고 했다. 무엇보다 자식들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았으니까.

큰 놈의 부축을 받으며 병원으로 들어섰다. 이곳은, 내가 사는 소도시에서는 꽤 큰 요양 병원이다. 아닌 게 아니라 100세 시대라더니 나 같은 쓸모없는 사람들이 많긴 많은 모양이었다. 병원은 전통시장처럼 노인들로 북적거렸다. 큰놈은 자주 찾아뵙겠다고 거듭 말하고는 돌아갔다. 그게 벌써 칠 여년이나 되었다.

아랫도리에 찝찝함을 느낀다. 기저귀 밖으로 배변이 샜는지 팬티까지 젖은 듯하다. 설사가 나왔나 보다. 시간이 지날수록 피부가 똥물로 절여지는 것 같다. 기저귀를 교환하려면 세 시간이나 기다려야 한다. 기저귀 교환은 하루에 다섯 번 이루어진다. 물론 언제든 기저귀를 갈아 달라 요구 할 수 있지만, 먹고 싸고 밖에 모르는 것이 지렁이보다 못한 것 같아 참기로 한다. 그런데 실뱀 같은 쾨쾨한 냄새가 코 속으로 기어들더니 뇌세포를 건드린다. 머리가 지끈거린다.

입원 수속을 마치고 처음 병동 문을 여는데, 순간, 코 속으로 달려드는 게 있었다. 역하여 괴로운 냄새였다. 냉장고 깊숙한 곳, 부패된 생선에서 나는 것 같았다. 냄새는 노인의 몸을 제물로 삼아 내장 깊은 곳에서 만들어져 수포처럼 피부 밑에 도사리고 있다가 슬며시 밖으로 새어 나오는 것 같았다.

냄새는 사각의 젤리통조림처럼 병동 안에 꾹꾹 쟁여져 있었다. 때로 담배 연기처럼 위 아래로 유연하게 움직이다가 마치 날개 달린 생물처럼 날아다녔다. 냄새는 분명 살아있는 생명체였다. 냄새는 한 번씩 움찔거렸다. 보호자들의 방문이나 직원들이 드나들 때였다. 일시적으로 들어온 외부 공기는 냄새의 위력을 누그러뜨리기엔 어림없었다.

냄새에 찌들었는지 노인들의 피부색은 누렇다. 볼품없이 늘어지고 겹겹이 주름진 피부, 그 사이 보일 듯 말 듯 이물질처럼 껴 있는 이목구비하며, 희로애락은 잊은 지 오래라는 듯 표정마저 쇠붙이처럼 딱딱하다. 다만 침대 발치에 걸린 명패가 현재 그들을 말해줄 뿐이다. 물론 내 침대에도 명패가 걸려 있다. ‘파킨슨. 안라사. 72세. 여자.’ 70세도 여자일 수 있을까. 한 때 그렇게 생각한 적도 있었으니 그냥 사람정도라 해 두자.

윙윙거리던 TV 소리가 죽어 있다. 조금 전까지 노인들끼리 소리가 작네, 크네, 볼륨을 높여라 낮춰라, 실랑이를 벌이더니 직원 누군가가 숫제 꺼 버린 모양이다. 노인들은 사소한 것에 예민하다. 작은 것으로 시작된 실랑이가 나중에는 큰 다툼이 되기 때문이다. 벽에 걸린 시계의 초침만이 부질없이 하나씩 칸을 나열한다.

간호사실 분위가가 조금 들떠 있다. 직원들이 간호사실에 모여 풍선을 불고 있다. 길쭉하거나 둥글거나 갖가지 모양의 풍선들이 뒹굴고 있다. 반짝이는 것들도 있다. 장식용으로 쓸 모양이다. 수간호사가 말을 건넨다.

“이번 달 우리 병동 생일잔치 준비해요. 라사씨도 참여해야지요.”
“움직이고 싶지 않아요.”
“케이크는 잘라서 가져다 드릴게요.”
“통증이 심해요. 먹는 것도 안 반가워요.”

나도 모르게 불퉁한 어투가 튀어 나간다. 매년 하던 행사인데 까닭 없이 서럽고 슬프다.

며칠 조용하던 옆 침대 노인이 발동이 걸렸다. 다리에 힘이 없어 24시간 침대에 누워 지내는 90대 노인이다. 식사 시에만 상체를 일으켜 세워주면 겨우 자신이 식사를 한다. 살아 있는 부분은 상체뿐이다. 한번 입을 열기 시작하면 삼일은 밤낮으로 쉬지 않고 말을 해댄다. 입술이 산소부족으로 새파랗게 변색 될 때까지다. 주로 욕설이 많지만 간간이 재미있는 이야기도 한다. 욕들은 노인의 입속에서 뛰쳐나와 메뚜기처럼 튀며 다닌다. 거칠고 성가신 부유물이지만 노인들은 반응이 없다. 빛바랜 의식 속에 남은 것은 한량없는 아량인가 아니면 자신의 마음을 대신하고 있다는 무언의 허용인가 알 수 없다. 사람들은 누구나 쏟아 놓고 싶은 무언가를 가슴에 담고 있을 테니까.

오늘은 운 좋게도 노랫가락 같은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아. 그 남정네 말이시. 여그 아줌마들도 봤는가 모르겄소. 훤칠한 키에 코는 우뚝했어라. 눈은 그리 크지 않았지만 내가 보기에는 멋있게만 보였지라. 동네 마실갔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제라. 뭐시기 구신 같은 게 시커먼 거시 내 앞을 떡하니 가로 막는 게 있었지라. 내가 놀라뻔져서 어머나어머나 왜 이러시오 하니께, 말은 않고 거시기 고놈의 대갈빡만 벅벅 긁어 뿐지더만. 옘병할 고로코롬 부끄럼질만 할라만 뭐라 내 앞을 가로 막았는지. 내가 고놈의 팔을 제껴뿐지고 훽하니 지나쳐 왔는디. 돌아보니 어깨가 축 늘어지고라. 돌아가는 폼새가 여엉 불쌍혀서 맻번 만나줬지라. 아, 글씨 어느 날 밤에 그 뭐시 우엉, 부엉이 소리가 났어라. 찌리찌릿, 벌레도 울어 쌓는디. 갑작스레 내를 팍 껴안더니 내 입수부리에, 거시기, 저, 자기 입수부리를 떡하니 갖다 대는 거시여. 워찌나 다리가 떨리던지. 철퍼덕 땅바닥에 주저앉을 뻔했구먼. 시작한다는 운도 끝난다는 마무리 말도 없지만 오늘은 꽤나 연결이 잘 된다. 특색 있는 사투리도 듣기 나쁘지 않다.

이럴 때면 문득, 주위가 낯설다. 여기는 어디이며 어딜 가는 길이었을까. 무슨 이유로 여기 있는 것일까. 왜 이렇게 고통에 끌려 다니고 있는가. 나는 내게 이토록 무력하고 무책임한 사람이었던가. 생각들이 파도처럼 몰아친다.

며칠 전에 입원 한 나르샤가 의자를 당기며 내 옆에 앉는다. 그녀는 병동 내를 종횡으로 쏘다닌 이유로, 왕 여사로부터 단번에 나르샤란 별명을 얻었다. 늘 반장을 맡았으며 뛰어난 성적과 빼어난 미모로 반에서 단연 두드러졌던 그녀였다. 특유의 그 허스키한 목소리도 한몫 했다. ‘너어, 너. 라사 아니니. 안라사.’‘어, 그으래.’ 거친 판자를 긁는 듯한 질문에 내가 어물거리며 대답을 했다. ‘널 여기서 다 만나는구나, 일케 꼼짝없이 누워 있게 된 게 얼마나 된 고야?’ 그녀의 말은 걱정을 담고 있었지만 표정은 비웃는 듯 한쪽 입술을 위로 살짝 당겨 올렸다. 담임선생님이 국어 담당이셨는데 그녀는 유독 담임선생님의 관심을 독차지하려 했다. 총각이었으니까. 시를 들려주기를 좋아했고 말끔하게 생겼으니까. 그런데 국어 성적만큼은 그녀보다 내가 좋았다. 선생님께서 수업시간에 내게 칭찬을 하면 그녀는 가시눈을 하고 나를 노려보았다. 수업이 끝나면 내게 와서는 슬며시 자기 속내를 내비치기도 했다. 잘 한 것도 없는데 네가 선생님에게 관심 있어 보이니 그냥 띄워 준 것이라고. 순진한 남자이니 꼬리치지 말라고도 했다. 나는 그때처럼 말없이 미소만 지었다. 세월이 흘렀어도 그녀의 무례함은 변함이 없었다. 조금의 위안이라면 종일 입술을 붙이고 있어서 치태가 두껍게 쌓이고 혓바닥이 굳은 것 같기도 하고, 입안에 세균들이 우글거리겠다 싶을 때, 그녀의 등장으로 텁텁한 입안에 새로운 공기가 들어 찰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고나 할까.

간호사실을 중심으로 뒤쪽은 주로 알츠하이머형 치매나 당뇨, 고혈압, 부분마비 같은 가벼운 질환으로 식사와 일상생활이 가능한 노인이, 앞쪽은 병의 정도가 심해 스스로 일상생활을 할 수 없는 노인들이 거주한다. 나르샤의 말에 의하면 자기는 평소에 고혈압하고 당뇨를 앓고 있었는데 갑자기 혈압이 올라서 혈압 조절 때문에 입원했단다. 그것도 자기는 입원을 원하지 않았지만 남편이 안정적으로 치료를 하자고 우겨서 못이기는 척 그 뜻을 따라 주었다는 것이다. 찾아온 쪽이 그녀이니 이야기는 주로 그녀가 하도록 내버려둔다. 어느 날은 묻지 않은 이야기를 했다. 여고 시절 사랑했던 동네 오빠가 있었다. 공부도 않고 밤늦게 함께 있다가 부모님에게 들키고 말았어. 때문에 강제로 헤어졌지만. 나이 들어 가끔씩 생각난다. 지금은 어떻게 얼마나 변했을까. 어디서 뭘 하고 살고 있을까. 한번만 만나봤으면 좋겠다 생각했다. 철부지 맹목적인 사랑이기도 했지만 정말 많이 좋아 했거든. 말을 마친 그녀의 눈이 반짝거린다. 여태 꽃빛 바람 하나를 간직하고 있었다니, 그녀가 싱싱한 생화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이성이라곤 남편 밖에 모르는 내 아둔한 감각으로 도무지 이해 할 수 없는 것이, 틈만 나면 시시콜콜 순대할배에 대해 묻는 일이다. 자녀들은 몇이며 아내는 있는지 자주 방문하는지 키는 자기만큼 큰지 예쁜지 등등. 그럴 때면 홍조 띤 얼굴을 하고는 앉았다 일어섰다 주변을 살피며 꼭 발정난 암캐처럼 군다. 그런 질문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나는 기저귀의 찝찝함을 견디며 응~,응~, 부인이 오긴 오는데 관심 있게 보질 않았으니 잘 모르겠네. 대답 아닌 대답으로 대화를 이어가며 나는 그녀가 가 주었으면 하는 마음을 내비친다. 그래도 그녀가 좀체 그 기미를 알아채지 못하고 자기 얘기를 계속 하면 나는 짜증 섞인 어투를 하고 만다.

“할아버지한테 관심있냐.”
“저딴 할배한티 관심은 무신.”
“그럼 가거라. 내 피곤하다.”

나르샤가 머쓱한 듯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왕 여사가 기저귀 담긴 카를 끌고 온다.

왕 여사가 내 바지를 내리려다가 메스꺼움을 뱉는다. 마스크 위에 마스크. 철통 무장을 했는데도 내 부산물에서 풍긴 것이 그녀의 코를 덮친 모양이다. 그녀가 내 허벅지를 툭 친다. 엉덩이를 움직여 달라는 신호다. 기저귀 교환을 서둘러 마치고 싶음일 것이다. 나는 허리에 힘을 주고는 겨우 기저귀를 뺄 만큼만 엉덩이를 든다. 내장의 경직으로 배변이 수월하지 않아 매번 변비약을 먹어대니 변은 묽은 죽 같을 것이다. 낡은 헝겊처럼 늘어졌을 맨살과 위장이 배출 한 누런 액체에 애잔함을 느낀다. 물수건이 내 사타구니에 닿는다. 차갑다. 감각은 살아 나를 염치없는 사람이 되게 한다. ‘똥은 두면 살 된대요.’ 누런 액체에 절인 내 살갗이 애처롭긴 하는지 나를 지지하는 말을 한다. 나는 자꾸만 허벅지를 조아린다. ‘에그, 이러면 내가 일하기가 힘들어져요. 힘 빼요.’왕 여사 목소리에 불만이 섞였다. 생면부지의 사람 면전에 가장 부끄러운 곳을 드러내고도 아무렇지 않은 듯 있는 나. 이런 뻔뻔함이 내 안에 있었던가 보다. 다시, 그녀가 내 엉덩이를 툭 친다. 이번에는 온힘을 다해 엉덩이를 든다. 기저귀를 집어넣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주기 위해서다. 제대로 작동이 되지 않는 노인 몸은 코끼리 몸통이다. 그것도 하루에 수십 명씩 대여섯 번을 들었다 놓았다 해야 하니 여사들의 손목에는 늘 각종의 파스가 붙어 있다. 그녀가 거둬들인 기저귀를 보따리에 집어넣는다. 보따리에서 나는 냄새가 늠실늠실 들큰 구수하게 후각을 건드린다. 짜고 맵고 시고 쓰고 단 것들을 받아들여 거르고 발효시키고 응축시켜 하나의 향으로 변화 시킬 수 있다는 것은 신비이다. 자연의 섭리를 아는 농부는 퇴비에서 향수 냄새를 맡는다.

나와 왕 여사는 밀착된 공생 관계다. 한 쪽은 빨리 기저귀 교환이 끝났으면 싶음이고 한쪽은 이일로 먹고 살기 위함이다. 비중을 따지면 그녀에 기대어 사는 나는 기생물이다. 살아있음이 꼭 죄만 같다.

엉덩이를 드는 과정이 내 딴에는 힘에 겨웠나 보다. 다리부터 시작한 경직이 근육의 줄기를 타고 위로 오른다. 아랫부분이 옥죄어진다. 누군가 주먹으로 복부를 강타한 듯 배가 통증으로 뭉친다. 고통은 매번 나를 절망에 빠지게 한다.

한 달 전, 작은 놈 식구가 방문했다. 공사장을 따라 다니며 육체노동을 해서 살고 있으니 삶이 얼마나 힘들까. 겨우 시간 내서 왔을 것이다. 그 때, 나는 줄곧 뼈가 낱낱이 부서지는, 가시가 세포를 파고드는 듯 한 통증을 느끼고 있었다. 몸을 일으키든지 돌아눕든지 구르든지 악, 악, 소리라도 지르든지 어떻게든 하고 싶었지만 나는 얼굴을 모로 돌리고 이빨을 깨물며 눈을 감고 있었다. 아들이 엄마, 엄마, 불렀다. 며느리와 손자들은 내 팔과 다리를 주물러댔다. 아들의 목소리는, 그들의 행동은 내게는 또 다른 통증이었다. 나는 아들에게 식구들을 데리고 가라고 등을 떠밀었다.

고통에 지친 모습밖에 보여줄 게 없다면 나는 부모가 아니었다. 그날 이후, 나는 확실한 무언가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내가 취침 약을 먹을 무렵이면 대부분의 노인들은 이미 잠이 들었다. 늦은 투약 시간 때문인지 간호사도 자기 일을 서둘러 마치고 싶은지 내가 빨리 약을 삼켜 주기를 바라는 눈치가 역력했다. 나는 미리 침을 삼켜 입안을 마르게 했다. 간호사가 내 손바닥에 알약을 놓자 그녀가 보는 앞에서 약을 입안에 넣었다. 그리고는 물을 마시는 척하며 컵을 입술에 갖다 대기만 하고는 알약을 혀 밑으로 밀어 넣었다. 간호사가 옆 침대로 등을 돌리자마자 나는 재빨리 알약을 휴지에 뱉었다. 간혹 환자 입을 벌리게 하고 약을 삼켰는지 확인 하는 경우가 있으나 그럴 땐 삼키면 그만이었다. 상체를 기울여 상두대 중간 서랍을 열고 두루마리 휴지 가운데로 돌돌만 뭉치를 밀어 넣었다. 원통으로 비어 있던 곳에는 휴지 뭉치가 하나하나 쌓여갔다.

“바따. 엉디 이부다.”

순대할배가 갓 말문 트인 유아의 발음을 한다. 틀니를 착용하지 않아서 이다. 내 엉덩이를 봤다. 예쁘다는 말이다. 병원 편의에 따라 복도를 사이에 두고 남녀를 양쪽으로 갈라놓았다. 고개만 들면 마주보기 좋은 거리에서 순대할배가 검지로 맞은편을 가리키는 것이다. 오늘따라 가리개가 제대로 쳐지지 않거나 가리개 사이로 엿볼 수 있거나 해서 내 기저귀 교환 장면을 본 모양이다. 나는 옷매무새를 고치고 이불을 허리께로 잡아당긴다. 앙상하게 만져지는 쇄골 위에서 열감을 느낀다.

할머니 하나가 간호사실 앞에 진드기처럼 붙어 서서 지속적으로 같은 말을 반복한다. 그림 그리기는 언제 하냐고 치근덕대는 것이다. 다른 노인에 비해 조금 나은 그림솜씨를 지닌 그녀. 어서 미술 시간이 되었으면 칭찬을 들었으면 싶은가 보다.

해가 하늘 중앙을 지나 병동에 빗겨 걸려 있는데 큰 놈한테서는 연락이 없다. 큰놈을 본지가 얼마나 됐을까. 넉 달 전? 다섯 달 전?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큰놈의 목소리가 듣고 싶다. 보고 싶다.

큰놈은 지금까지 나를 있게 한 버팀목이었다. 남편과 같았으니까. 내가 얼굴을 찌푸리면 통증이 있냐며,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밤늦게 돌아와 지쳐 있으면서도 싫증 한번 내지 않고 다리를 주물러주던 놈이다. 서울에 있는 명문대학에 들어갔고, 아르바이트를 해서 자신의 학비를 충당했고 대기업에 취업했다. 며느리도 가정교육이 잘된 집안에서 데려와 별 탈 없이 잘 살고 있다. 다른 부모들은 숨소리도 낮춘다는 고3 때에 챙겨 주기는커녕 병을 얻었으니 어떻게 그 미안함을 말로 할 수 있을까.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작은놈도 감감무소식이다. 내 생일을 잊은 적은 없다. 무슨 일이 생겼을까. 혹여나 병원비 때문에 문제가 생긴 건 아닌지 모르겠다. 누구도 되도록 비싼 약은 쓰지 마라, 기저귀 교환 횟수를 줄여라, 물휴지나 소모품들을 아껴 써 달라고 병원 측에 말 안 할 것이다. 차마못할 것이다.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것도 사람답지 않게 만드는 것도 돈이니까. 아님 형제간에 무슨 일이 생긴 걸까. 노년을 홀로 독립할 능력이 없다는 건 자식에게 의무나 책임을 지게 한다는 것일 게다. 책임지는 입장이 여럿일 때는 서로에게 미룰 수밖에 없는 상황도 생길 수 있다. 피로 맺어진 형제가 부모 때문에 원망을 주고받는 사이가 될 수 있다.

어느새 직원 교대가 있었는지 저녁 번 허 간호사가 병동을 돌고 있다. 오십대로 보이는데 연륜 탓인지 비교적 환자들에게 관대하다. 말도 안 되는 노인들의 억지 요구도 곧잘 허용한다. 굳이 노인의 고집은 꺾을 필요도, 환자와 다툴 필요도 없다 여기고 있는지 모른다. 유난히 세심하고 예민한 촉을 가지고 있어 조무사나 간병사가 긴장을 한다.

‘잘 가셔. 고맙구만요. 병문안을 다 오고요.’ 나르샤가 나이든 남자와 젊은 여자를 배웅 하는데 인사를 하는 모양새가 모르는 사람에게 하듯 한다. 치매 노인들 때문에 잠겨 있는 병동 출입문을 열어주고 닫고 온 왕 여사가 나르샤의 남편과 딸이라고 한다. 어쩐지 누구에게나 함부로 오가며 말을 해대는 게 이상하다 했더니. 그녀가 치매였단 말인가.

“딸년이 이웃집 아저씨하고 왔다 갔네. 딸한테 이제 자주 안 와도 된다 캤어. 내는 여기 오래 있지 않을 작정했었는데, 이제 맴이 바꿨네. 쫌 더 있다 갈라꼬.”

나르샤가 내 옆에 선다. 잘했네 잘했어. 두둔을 하며 순대가 든 비닐봉지를 건넨다. 바로 앞에 있는 저 할아버지가 주는 거야. 나는 습관적으로 먹을 것을 내민다. 속이 불편해서 못 먹어. 소화도 안 되는데 웬 순대는. 그녀가 내 손을 뿌리친다. 괜스레 신경질이다. 그리곤 한참이나 나와 순대할배를 번갈아가며 노려본다. 그녀의 눈초리에 적대감까지 깔려 있다. 나는 봉지를 도로 상두대 위에 놓는다. 언제는 배고픈데 뭐든 주라며 아무거나 곧잘 먹어대더니 도저히 이 할망구의 속내는 알 수 없다. 휑하니 사라지는 그녀 뒤에서 숨을 헐떡이는 노인 하나가 허망함을 보탠다.

산소마스크에 기대어 들숨과 날숨을 힘겹게 반복하는 백순 할머니. 바깥 같으면 백순 잔치가 열릴 만도 한데 며칠째 좋지 않은 상태가 오락가락했다. 다섯 남매가 교대로 오고가며 곁을 지키더니 지금은 혼자 있다. 갑자기 그녀가 숨을 몰아쉰다. 간호사가 오더니 산소 게이지를 올린다. 이어 달려온 의사가 노인의 가슴 위에 두 손을 얹어 힘껏 눌렀다 뗐다를 반복한다. 억, 그녀의 입에서 외마디 비명이 터진다. 몸을 움찔거린다. 의사의 힘을 견디지 못하고 늑골이 몇 개 부러졌나 보다. 단 얼마간의 연명을 위해서 저토록 고통스러워야 하는 것은 누구를 위한 인내이며 무엇을 위한 희생인지 알 수 없다. 노인의 호흡이 빠르다가 느리다가 끊어지기를 반복한다. 점차 숨소리가 옅어진다. 이내 뚜∼. 심박동기계음이 같은 높이의 음으로 이어진다. 간호사가 흰 시트를 주검 위에 덮는다. 이내 불필요한 소음은 소거되고 기계들이 치워진다. 또 한 덩이 냄새가 줄어든다. 이 도도한 소멸 앞에 나는 기체의 경건함을 생각한다.

세상은 기체가 지배하고 있다. 모든 존재는 한 덩이 기체로부터였고 기체가 되는 중이다. 끝내는 기체가 되어야만 한다. 모든 존재는 기체가 될 때 비로소 온전해지는 것이다.

담당의가 늦은 회진을 한다. 노인병원의 의사들은 대부분 노인들이다. 젊고 의욕 있고 실력 있는 의사가 노인병원에 있을 이유는 없다. 꼭 필요 하지도 않다. 어쩌면 노인 병원 의사는 노인이 더 잘 어울리는지 모른다. 이심전심 동지애는 더 돈독해질 수 있으니까.

“수면제만 요구하네요. 나이 들면 저절로 잠이 줄어들기도 해요. 약을 조금 줄여보는 것도 괜찮은데요.”

내 요구가 지나치다는 말인가. 의사의 말을 고맙게 받아들일 수 없다. 침을 삼키며, 꺽꺽대는 마른 목을 움직이기만 할뿐 나는 입술을 떼지 않는다.

휠체어에 앉은 한 할머니의 가슴과 두 손 위에 두꺼운 끈이 교차되어 있다. 그녀 입에서 가느다란 목소리가 새어 나온다. 풀어 줘어∼. 풀어 줘∼. 연신 입술을 오물거린다. 할머니는 온 병동을 파헤친다. 나무젓가락으로 벽에 붙은 전기 스위치를 떼고 바닥 장판을 뜯고 드러난 시멘트 바닥을 판다. 결국 두 손과 온몸을 강제 당하고 말았다. 노인은 젊은 시절에 꽤나 깔끔을 떨었을 것이다. 노인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갑갑해진다.

의사가 내 몸을 돌려 젖히며 핀셋을 집는다.

“욕창 치료해야지요.” 

소독약 냄새를 따라 의료진의 목소리가 줄넘기를 한다.

“지금은 어떻나요?”

“지난밤에는 잘 주무셨어요. 오늘은 큰 아드님에게 가겠다는 억지 안부리세요.”

아침부터 묻고 싶은 게 있었다. 설마 싶어 차마 묻지 못하고 있던 것. 양 손목에 난 팔찌 같은 뚜렷한 붉은 자국. 내가 걷지도 못하면서 아들놈에게 가겠다며 악다구니를 써 양 손목을 묶었나 보다. 내 의식은 나를 떠나 암흑 속 어디를 헤매다 왔단 말인가. 마지막 순간이 언제일지라도 정신만큼은 잃지 않으리라 다짐했었다. 그런데 나를 어기고, 놀리고, 비웃는 내가 내 안에 있다니. 내가 나를 속이고 있다니. 나를 무너뜨리려는 알 수 없는 존재의 계략에라도 넘어갔더란 말인가.

한 달 전부터 엉덩이에 생긴 욕창은 나아지기 보다 더 깊어지고 있는지 거즈를 벗겨낼 때마다 살이 떨어져 나가는 듯 쓰리다. 어금니를 악문다. 천장이 가까워졌다 멀어지기를 반복한다. 의사가 반창고를 붙인다. 간호사가 몸통을 밀어 나를 바로 눕힌다. 이내 통증은 사지의 신경을 끊어버릴 듯 뾰족한 끝을 들이댄다. 쇠못이 몸을 찌르며 다닌다. 열이 오르고 온몸이 화염에 휩싸인다. 손으로 가슴을 누르며 간호사를 부른다.

“다리를 잘라냈으면 좋겠어요. 진통제 좀 주세요.”

간호사가 빠른 걸음으로 약을 들고 와 내 입에 넣는다. 콩알보다 작은 한 개의 낱알. 나는 그 위력 앞에 굴복한다.

몇 번을 뒤척이다 까무룩 눈을 감는다. 침대 아래 구멍이 뚫려 있다. 끝도 보이지 않는 검은 구멍. 나는 굴러 떨어진다. 내려가고 내려간다. 가슴이 조인다. 숨을 들이 쉬려고 하나 잘 쉴 수가 없다. 숨이 막혀버릴 것 같다. 억지로 두 팔을 움직이려 해도 말을 듣지 않는다. 큰놈이 곁에 서 있다. 나는 손을 내어민다.

야야. 왔구나. 내 가슴을 좀 두드려다오.

아무리 손을 휘저어도 잡히는 건 허공뿐이다. 놀라 눈을 뜨니 온 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어릴 때 하던 놀이가 있다. 풍뎅이 목을 한 쪽 방향으로 비틀어 배가 하늘을 향하게 놓으면 고놈이 팽이처럼 뱅글뱅글 돌았다. 그 풍뎅이, 자기 몸이 원망스러웠을까. 차라리 그 몸을 버리고 도망가고 싶었을까.

큰 놈은 동생이 제 몫까지 잘 하고 있으리라 믿고 있을 것이다. 나르샤에게 전화를 부탁해 볼까 하다가 그만 둔다. 입원실에서 필요도 없는 스마트폰이다. 최신형으로 비싼데 아들이 사주었다며 자랑을 얼마나 해대는지. 그깟 전화 한 통화에 얼마나 허세를 부릴지 모른다. 또 아들을 성가시게 할 필요도 놀라게 할 필요도 없다. 내 병원비로 충당하던 집 판돈은 이미 바닥났을 것이다. 어쩌면 큰놈이 병원비의 상당부분 책임을 떠안고 있을지 모른다. 동생까지 살림에 보탬을 주고 있다하니 그렇게 살려면 엄마 찾아올 시간이 없을 게다. 언젠가 오겠지. 바쁜 건 좋은 일이다. 잘 산다는 증거니까.

나르샤의 허스키한 목소리가 들린다. 노래를 하면 성향이 풍부하여 꽤나 듣기 좋다. 휴게실에서 생일 파티가 벌어지나 보다. 주검을 치운지 불과 몇 시간 지나지 않았다. 노인들에게 주검은 일상일 뿐이다. 생명을 가지 사람은 누구나 맞는 것이다. 그날이 올 때까지 그냥 하루를 보내면 된다. 태어남도 산다함도 죽음도 내 의지의 소관이 아니다. 남편도 아이들도 내 병도 그랬다. 마음을 비우니 기분이 가벼워진다. 참 부질없는 계획을 했나 보다 싶다. 상두대 안에 두었던 휴지 뭉치들을 모아 베갯잇 속으로 옮긴다. 저녁 때 직원이 쓰레기통 치울 때 버리면 된다.

간병사가 침대 상부를 올려 노인들이 앉은 자세를 취하게 만든다. 식판이 실린 차가 온다. 미역 냄새다. 야쿠르트 때문에 점심을 걸렀으니 저녁은 먹었으면 싶다. 두어 수저 국물을 목으로 넘긴다. 서너 수저 죽도 떠서 입에 넣는다. 겨우 시작을 했는데 헛구역질이 난다. 위가 비어 있는 것에 익숙해진 모양이다. 그만 수저를 내려놓는다. 조금이라도 더 먹어야 한다는 간호사의 말을 귓등에 두고 왕 여사에게 침대를 내려달라 한다. 앉아 있기도 힘이 든다. 눈을 감는다.

갑자기 거친 손이 내 목을 타고 들어와 가슴을 훑고 나가는 것과 동시에 보드랍고 뜨거운 살덩이가 입안으로 쑥 들어왔다가 나간다. 전신이 감전된 듯 정신이 아뜩하다. 순대할배가 자기 자리로 간다. 장난꾸러기 아이처럼 어깨를 들썩이고 히히거리며 가는 본새가 아주 만족한 듯 신이 난 몸짓이다. 뜨거웠던 감촉이 입안에서 맴돈다. 마음속에서 따스함이 스멀거린다. 남편은 내 고통을 알고 있을까. 세 식구가 어찌 살고 있는지 관심이나 있을까. 측정할 수 없는 그와의 거리가 나를 슬프게 한다. 원망이 깊어지면서 그리움은 더 커진다.

“이 양반이 미쳤나.”

어디서 나타났는지 나르샤가 순대할배의 등을 후려친다. 그녀가 그를 노려본다. 눈에서 불이 나는 것 같다. 씩씩거리며 거친 호흡을 하고 주름진 목에 힘줄이 솟아 있다. 그가 서둘러 자기 침대로 올라간다. 웬 낯선 할망구가 나를 치네, 영문을 모르겠네, 싶은 듯 나르샤를 힐끗 스치듯 바라보더니 이내 얼굴은 나를 향한다. 돌이킬 수 없는 큰일을 저질렀다는 생각을 하기는 하는지 고개는 숙이고 가자미처럼 눈을 비껴로 홀려 본다. 허 간호사는 두 노인의 행동의 근원을 다 알고 있다는 듯 그냥 넘겨서는 안 되는 일을 해결하려는 듯 타박타박 힘 준 걸음으로 다가온다.

“낙 이따.”

순대할배의 검지가 내 상두대를 향한다.

“뭐라꼬요?”

되묻는 간호사의 눈에서 반짝 빛이 난다.

“쪼기, 냑 이따.”

무언가 잘못돼 가는 거라고, 누구도 치매 노인의 말을 듣진 않을 것이며, 이 곤혹스러움은 곧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나갈 거라 여긴다. 하지만 나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간다. 두 손을 꼭 쥔다.

허 간호사가 눈썹을 치켜세우더니 싸늘한 얼굴을 하고 내게로 온다. 익숙한 손놀림으로 상두대를 뒤지기 시작한다. 가만히 눈을 감는다. 머리는 베갯잇 속에서 비닐봉지를 감지한다. 위 서랍을 열면 치약?칫솔이, 가운데 서랍을 열면 화장지, 양말이 있을 것이다. 서랍 아래 여닫이문을 마구 당겼는지 쿵 하고 유리병이 떨어진다. 유리 조각들이 바닥에서 흩어진다.

로션 병이 깨졌다. 주워 담을 수도 없다. 왕 여사가 뛰어와 병조각과 범벅이 된 로션을 쓰레받기로 쓸어 담는다. 간병하는 여사가 물수건으로 얼굴을 닦고 가면 로션만큼은 내가 직접 발랐다. 뚜껑을 열면 코 속으로 흘러드는 꽃잎 같은 향내. 손바닥에 닿는 매끄러움. 얼굴의 온기. 유일하게 즐기는 생생한 감촉이었다. 허 간호사의 손이 베개 쪽으로 옮겨 오려고 한다. 나는 고함을 지르고 만다.

“내 로션. 아직 많이 남았잖아요. 얼마나 아껴 썼는데요. 아들놈이 사다 준거란 말에요.”

나는 가쁘게 숨을 들이쉰다. 노인들이 병동을 들썩일 기회를 기다렸다는 듯 뒤쪽에서도 고함이다.

“이년아. 내에 수울∼ 뉘가아 숨겨었어∼ 내 놔아라∼. 이년언드라아∼.”

“이년아, 내 머리채 놓아라. 왜 나한테 난리야”

술에 취한 듯 나르샤의 꼬부라지고 늘어진 허스키 목소리와 또 다른 할머니의 목소리가 병동을 긁어댄다. 허 간호사가 뒤를 돌아보더니 ‘치매 할머니들 때문에 내가 못살아’ 라며 뒤쪽으로 뛰어간다. 후∼. 나는 한 숨을 내어 쉰다.

숨겨 놓은 술을 내어 놓으라는 허 간호사의 요구에 모른다 없다는 나르샤의 저항이 계속된다. 결국 사물함 검사를 하겠다고 허 간호사가 모두에게 알린다. 이제 전체 병실을 뒤집을 것이다. 상두대 속을 끄집어내고 베갯잇, 침대, 시트 등을 벗기고, 털 것이다. 언제나 그랬듯이 금지된 소량의 담배, 술, 돈 등이 적발될 테다. 직원들은 모두 뒤 쪽으로 갔다. 잠시 후면 앞쪽으로 몰려 올 것이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내가 하고 싶은, 나를 위한 어떤 것도 할 수 없다. 집중 감시를 받게 될 테니까.

입안이 건조하다. 입천장에 실타래가 엉켜 붙은 듯하다. 다리는 부어 있어 감각이 둔탁하다. 온몸이 어디론가 떠 갈 것 같다. 손은 지푸라기 한 올도 잡을 힘이 없다. 감각이 흐릿해지면서 오히려 고통이 옅어진다. 모든 것은 최고정점에 이르면 내려가고 늘어진다. 편안하다. 그렇다. 내가 승자가 되는지 아니면 패자가 되는지는 전적으로 내 선택과 결정에 달려 있다

심장이 굳어버릴 시간은 얼마나 남은 것일까. 기껏해야 하루, 어쩌면 일주일 정도, 아니 상당 기간 지연될 수 있을 테다. 견뎌야하는 시간이, 살아 있음이, 내게 어떤 의미나 가치가 있단 말인가.

어느새 해는 가버렸고 창밖은 어둠이다. 병동은 5층의 높이에 떠 형광등 불을 켜들고 누렇게 부풀어 있다. 적발된 것들을 주지 않으려는 노인들의 볼멘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울린다. 지진처럼 병동이 흔들린다.

손목의 붉은 자국이 검푸른 색으로 변해 간다. 내 의사에 상관없이 다른 사람이 나를 함부로 다루었다는 건 무얼 의미하는가. 그 순간 나는 사람취급을 받을 수 없었다는 말인가. 누구라해서 나를 강제할 수 있단 말인가. 누구도 나를 대신해서 살 수 없고 내 의지를 꺾을 수 없다. 순간의 선택은 오롯이 내 몫이다. 나의 존엄은 내 자유에 있다. 내 존재에 손상을 입히는 것이 있다면 단연코 거부 한다. 이 시각을 위해 많은 것을 생각 했으며 충심으로 준비했다.

-아들들. 참으로 미안하다. 큰아들, 이 엄마는 내게 많은 짐을 지웠다. 내 병치레 때문이다. 작은아들, 대학을 보내지 못해서 힘들게 살아가게 만들었다. 내 잘못이다. 하지만 너희들은 이 엄마를 얼마나 많이 사랑하고 있는지 알고 있다. 고맙다. 너희는 내게 있어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물이었고 삶의 이유였다. 너희 있어 나는 행복했다.

써 두었던 쪽지를 상두대 위에 올린다. 육신의 고통도 고통이지만 제대로 못한 부모노릇 보다 더 큰 고통이 있을까. 이제 나도 편안해지고 싶다. 당신 곁에 있고 싶다. 참으로 힘들었다. 미루어 두었던 투정도 부리고 싶다.

흔히들 죽음은 삶의 완성이라고 한다. 아니다. 막상 이 순간을 앞에 두고 보니 죽음은 미완성이다. 사랑하는 것들을 두고 혼자 떠나야하는 이별이며 또 하나의 고통이다. 하긴 죽음이 미완성의 미완성인들 완성인들 어떻겠는가. 억울할 일도 슬플 일도 없다. 나는 내게 주어진 시간들에 최선을 다했다. 다만 지금 이 순간을 살 뿐이다. 그런데 눈물이 흐른다.

순대할배가 무념의 멍한 표정을 하고 있다. 양 손으로 조물락조물락 윗옷 끝을 묶었다 풀었다 장난을 하고 있다. 이 순간에 내 곁에 있어 줘서 고맙다. 휴지 토막이 한 장 나비 날개처럼 하르르∼ 난다. 날개들이 날 때마다 손바닥에는 알약들이 하나 둘 모여든다. 이내 한 주먹이나 된다. 그것들을 입안에 틀어넣는다.

나는 나를 뒤척여 반듯하게 만든다. 베개에 깊게 머리를 뉜다. 한 그리움을 위해

한 그리움은 묻어 버리자. 꿈인 듯, 환각인 듯, 증발되려는 듯, 공중으로 떠오르는 나를 느낀다.

■수상 소감

박지회씨= 경북 김천 출생, 매일신문 문예백일장 시부문, 동서문학상 시부문, 구미문예대회 수필·시·소설 부문 외 다수 수상.
푸르고 싱싱하던 시절을 뒤로한 채 기꺼이 자기의 생명줄을 놓고 있는 나뭇잎을 본다.

저 나뭇잎이 나무에서 떨어지는 것은 잎에게는 끝일까 또는 시작일까. 만약 끝이라면 또는 시작이라면 이것들은 유한할까 무한할까. 아니 어쩌면 매 순간은 끝도 시작도 아닌 경계일 수 있다. 이 경계는 끝과 끝의 경계란 말인가. 경계와 경계의 경계란 말인가 싶다가 끝도 없는 상념을 그만둔다. 경계는 다만 시간의 연속일 뿐이다. 시간 속 변화의 하나일 뿐이다고.

계절의 끝에서 흩날리는 것들은 가벼워서가 아님을 안다. 그 흩어짐과 날림 속에 들어있는 쉽지 않았던 시간과 쉽게 버릴 수 없는 것들의 무게를 알기 때문이다. 되돌아보면 삶이란 상식과 비상식, 옳고 그름의 모든 것을 포함하는 것이며 개인에게는 어둡고 아픈 순간과 맑고 반짝이는 무수한 순간들의 총합일 것이다.

육십이라는 나이가 되고 보니 삶과 죽음의 경계가 그리 멀지 않음을 느낀다. 내 육체의 마지막 순간에 나는 내게 어떤 모습을 보여야 할까. 이대로 그 순간이 오기만을 기다려야 하는가. 아닐 것이다. 차지했던 자리만큼 책임이 있을 것이다. 이 땅에 왔었던 나를 위해 어떻게든 무엇이든 먼지 만큼이라도 가치 있는 것을 남겨야 하지 않겠는가를, 늘어나는 노년층이 이 사회에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를 고민해 보았다.

나이 숫자만으로 위축되고 허전하고 침울하기까지 한 등을 따뜻하게 토닥여준 분들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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