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선규_대구교대교수2014.jpg
▲ 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그 모든 낯선 시간들’ (로렌 아이슬리, 김정환 역, 강, 2008)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자서전인데 일반적인 자서전과는 좀 다른 책입니다. 일반적으로 전(傳) 양식은 결과가 원인을 ‘통제’합니다. 아무리 쓰디쓴 과거의 경험일지라도 현재의 결과가 좋으면 모두 좋은 계기로 해석됩니다. 그런데 이 책은 그렇지 않습니다. 꽤 성공한 인류학자의 자서전인데 그런 ‘과거의 윤색’이 없습니다. 고통스러웠던 기억들을 가급적이면 원형대로 발굴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자신의 상처와 대면하는’ 고백록, 일종의 본격 자전 소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체니 구성이니 하는 소설적 기법을 압도하는, ‘발견의 진실’을 추구하는, 소설적 주제의 힘이 돋보이는 책입니다.

‘그 모든 낯선 시간들’이라는 표제는 작가 로렌 아이슬리가 자신의 일생을 한마디로 요약한 것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낯익은 시간과 낯선 시간을 교대로 만납니다. 낯익은 시간이 많으면 편하고 낯선 시간이 많아지면 불편합니다. 낯익은 시간을 만나면 하던 대로 하면 되지만 낯선 시간을 만나면 자작(自作) 새로운 방법이나 태도를 모색해야만 합니다. 사람이든, 과업이든, 낯선 존재들과의 만남은 항상 이완보다는 긴장을 부릅니다. 그러니까, ‘그 모든 낯선 시간들’이라는 표제는 그의 일생이 불편하고 긴장된 그 무엇으로 가득 차 있었다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 표제를 본 순간 무언가 찌릿하며 제 안을 빠르게 통과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몇 마디 그의 진술은 그의 시간과 저의 시간이 많이 닮아있다는 걸 느끼게 했습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엄마. 아무것도 아니죠. 쉬세요. 그동안 쉴 수 없으셨죠. 그게 어머니의 짐이셨어요. 하지만 이제, 주무세요. 곧 저도 함께할 거예요. 비록, 용서하세요. 여기는 아니지만요. 그러면 우리 둘 다 쉬지 못할 거예요. 저는 멀리 가서 몸을 누일게요. 때가 다가와요. 저는 돌아올 것 같지 않아요. 이젠 이해하시겠지요. 나는 10월 묘비석의 따스함을 어루만졌다.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 사실 하나를 알아채는 데 온 생애가 걸렸다” (39쪽)

그에게는 세상과의 만남 그 자체가 낯선 것이었습니다. 그에게는 가족이 최초의 불화였습니다. 모든 고통의 근원이었던 어머니,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가졌으나 청력에 문제가 있었고 타인과의 사회적인 소통에 늘 어려움을 겪었던, 정신병력이 있는 가계 출신이며, 남편과의 불화로 가득 찬 결혼생활에서 얻은 아들을 버려두고 떠난, 그래서 아들에게 늘 자신의 핏줄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을 안기던 어머니에 대한 마지막 인사를 그는 그렇게 적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돌이킬 수 없는 불화에 대한 마지막 화해의 제스처였습니다. 어머니와 끝내 화해할 수 없다는 말이 심금을 울렸습니다. 그리고 그것 하나 아는 데 온 생애가 걸렸다는 말도 감동적이었습니다. 나이 들면서 그런 생각이 자주 듭니다. 살면서 우리가 낯을 익혀온 것들은 모두 기만이었습니다. 면종복배(面從腹背)하는 것들이었습니다. 결국, 우리가 가졌던 시간은 모두 다 낯선 것들이었습니다. 그 모든 낯선 시간과 벌인 모의쟁투(模擬爭鬪), 일장춘몽(一場春夢)이 우리의 일생이었습니다. 로렌 아이슬리는 인생의 선배로서 저에게 묻고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니? 맞지?” 낯선 것을 용케 피해가며 살아온 지도 꽤 오래되었습니다. 그러나 종내 낯선 시간의 그물을 피할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운명입니다. 그 시간이 오면 우리 모두는 결국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고 맙니다. 나이 들어 만나는 ‘그 모든 낯선 시간들’, 참 좋은 말입니다.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