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파도·모래가 만든 '세월의 절경'에 감탄사 절로

천강정은 천정천과 동해바다가 합류하는 야트막한 산위에 세워져 있다.
명사십리(明沙十里)는 희고 고운 모래가 길게 펼쳐진 아름다운 바닷가를 말한다. 명사십리로 이름난 해수욕장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곳이 원산해수욕장과 포항송도해수욕장이다. 원산은 북한 땅이어서 갈 수 없고 포항 송도는 포스코가 들어선 뒤 그 아름다운 백사장이 없어졌다.

명사십리의 ‘명사’가 ‘곱고 흰 모래’가 아니라 ‘우는 모래’ 읽히는 곳이 고성 간성지방이다. 여기서 ‘명사’는 ‘울명(鳴)’자 ‘명사’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모래색이 눈같이 하얗고 사람과 말이 지날 때면 부딪쳐 나는 소리가 쟁쟁하여 마치 쇳소리 같다. 영동지방 바닷가 모래들이 모두 그러하지만 그중에서도 간성 고성 사이에 제일 많다” 대동여지도를 만든 김정호는 ‘대동지지’에 “청간정은 청간역 옆에 있으며 해안가에는 기암괴석이 어지럽게 서 있으며 해변 위 모래는 빛나니 흰 눈이 뒤덮인 것 같고, 밟으면 쇠가 부딪히는 소리가 나니 주옥을 밟는 것 같다”라고 썼다.

관동팔경 중 남한에서 가장 북쪽에 있는 천강정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청간정에서 ‘우는 모래’소리를 듣는다. ‘사람과 말이 부딪쳐 나는 소리’말고 정자 아래 저 멀리 파도가 우르르 몰려와 모래를 스치는 소리, 모래사장에서 갈매기가 날아오르며 우는 소리를 듣는다. 대통령하야를 주장하는 촛불시위는 열기는 더해가고 정치권은 탄핵시국에 돌아하는 등 시국은 하수상한데 남한의 최북단, DMZ와 불과 30여km 떨어진 고성의 청간정 앞 풍경은 풍화롭기 그지없다. 수만년 그래왔던 것처럼 강물은 바다로 끊임없이 밀려들고 바다는 파도를 밀어내고 있다. 파도에 쓸려가는 모래가 ‘우는 소리’를 낸다. 갈매기도 모래를 박차고 날며 들며 목청껏 울음소리를 내지른다. 이 풍경을 인조때 간성군수를 지냈던 택당 이식은 ‘수성지’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정자위에 앉아 하염없이 바라보면 물과 바위가 서로 부딪쳐 산이 무너지고 눈을 뿜어내는 듯한 형상을 짓기도 하고 갈매기 수 백 마리가 아래위로 돌아다니기도 한다. 그 사이에서 일출과 월출을 바라보는 것이 더욱 좋은데, 밤에 현청에 드러누워 있으면 바람 소리 파도 소리가 창물을 뒤흔들어 마치 배에서 잠을 자는 듯하다.

이승만전대통령이 쓴 청간정 현판. 정자 안에 걸려있다.
청간정은 남한에 있는 관동팔경 중 가장 북쪽에 있다. 설악산 신선봉에서 발원한 청간천이 화암사와 신평을 거쳐 동해로 흘러드는 하구, 야트막한 산언덕에 있다. 창건연대와 건립자는 알 수 없으나 중종 15년(1520) 간성군수 최청이 중수했다. 1844년 갑신정변 당시 불에 타 방치돼 오다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쳐 1955년 이승만 전 대통령 명으로 보수했고 1981년 최규하 전 대통령의 지시로 해체 복원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2층 누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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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겸제 청간정과 만경대
정자 이름 ‘청간’은 정자가 바위사이에 흐르는 물과 임해 있기 때문에 지어졌다. 이식은 정명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본래 청간역 정자로 만경대 남쪽 2리에 있었다. 간수(바위 사이를 흐르는 물)에 임해 있는 까닭에 이렇게 불렀다. 만경루가 허물어지자 역의 정자를 대 곁으로 옮겨옴에 드디어 승지가 됐다. 정자가 바닷물과 떨어진 것이 겨우 5, 6보이나 만경대를 모퉁이로 삼고 물속의 험준한 섬이 둘러 막아 먼저 물결과 싸우는 까닭에 예부터 수해를 입지 않는다. 비록 큰 바람으로 바다가 넘칠지라도 앞 계단을 넘어 닥치지 못하니 도리어 기이한 풍경이 된다.”

고성지역의 모래는 쇠소리가 난다고 해서 우는 모래, 명사라고 한다.
정자 외부 현판은 독립운동가이며 청파 김형윤 1928년에 쓴 글씨다. 청간정 현판은 우암 송시열이 썼다고 문헌상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고종 21년에 소실됐다. 정자 안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이승만 전 대통령의 ‘청간정’ 친필 현판과 최규하 전 대통령의 친필시판이다. 이 전 대통령은 1955년 중수 당시 이곳에 들러 현판을 하사했고 최 전 대통령은 1980년 여름에 이곳에 들러 한시를 남겼다. ‘설악과 동해가 마주하는 고루에 오르니/ 과연 이곳이 관동의 빼어난 경치로구나’ 이 밖에 택당 이식의 시판과 중수기가 걸려 있다. 청간정 우물마루에 앉아 내다보는 바깥 풍경은 장관이다. 동쪽으로는 ‘우는 모래’ 명사가 활을 뒤집어놓은 것 같은 형상으로 끝없이 펼쳐지고 바다는 수평선까지 눈부시게 아득하게 달려나간다. 바다 가운데 외로운 섬 죽도가 망망대해에 떠 있는 일엽편주 같다. 전날 비온 뒤의 가을 하늘은 저만치 더 높아졌다. 남쪽에는 마구 풀어헤쳐 놓은 넥타이 같이 구불구불 이어져 온 청간천이 바다로 합류하는 모습이 아름답고 서쪽으로는 단풍 제대로 든 설악산 신선봉이 울긋불긋 꽃단장을 하고 바다를 내려보고 있다.

천강정에서 바라본 죽도
청간정은 이처럼 아름다운 경관 때문에 조선 최고의 시인 묵객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았다. 정철의 ‘관동별곡’에도 청간정이 언급된다. “고성을 저만치 두고 삼일포를 찾아가니, 그 남쪽 봉우리 벼랑에 ‘영랑도 남석행’이라고 쓴 붉은 글씨가 뚜렷하게 남아 있는데 이곳을 유람한 사선은 어디갔는가? 여기서 사흘을 머무른 후에 또 머물렀는가? 선유담, 영랑호 거기에 가 있는가? 청간정 만경대 등 몇 군데 앉아서 놀았던가? 관동별곡에 언급된 ‘유람한 사선’은 신라 때의 화랑 영랑·술랑·남랑·안상등이다. 금강산에서 수련하고 무술대회에 나가기 위하여 고성군의 삼일포에서 3일 동안 쉬다가 금성으로 가는 길에 영랑호를 지나던 길이었다. 영랑은 호반의 풍치에 도취되어 무술대회에 나가는 것조차 잊었다고 하는데 그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청간정에서 보는 설악산 신선봉
청간정에서 뜻밖의 인물을 만난다. 조선후기의 아웃사이더이며 문체반정의 최대 피해자 이옥이다. 그가 자신의 시집 ‘박천시집’5권 ‘수의록’에 시를 남긴 것이다. 그는 글씨도 능하고 문명도 높았으나 직간을 잘하는데다 패관소품체의 글을 쓴다는 이유로 정조에게 찍혀 여러차례 유배를 당했고 끝내 벼슬길에 오르지 못한 불운아다.

소소리 높은 정자 큰 길 베고 누웠구나
풍악산도 동해도 이곳에 다 모였어라
횡으로 금강산을 바라본다 굽어보는 동해바다
천만개의 옥봉우리 은은히 보이누나
여섯자라 일군파도 허공만 때리듯이
만물도 절대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네
외롭지 않은 이몸 그래도 즐거웁다
훌륭한 사람 하나하나 평론하기 어려워서
난간 밖 동쪽에서 서성이며 주저하네

- 이옥의 시 ‘간성의 청간정’

▲ 글 사진= 김동완 자유기고가
청간정은 아름다운 풍광 때문에 조선의 유명한 화가들을 모두 불러들였다. 정선과 김홍도 강세황도 이곳에 들러 그림을 남겼다. 겸재정선은 영조 9년(1733) 청하현감에 부임하여 삼척부사 이병연과 함께 청간정에 들러 회포를 풀면서 ‘청간정도’를 그렸다. 이 그림은 5년 뒤인 1788년 제작한 ‘관동명승첩’에 들어갔다. 허필(1709~1761)은 총석정 삼일포 청간정 경포대 죽서루 망양정 월송정 낙산사 등 관동팔경을 돌아보고 ‘관동팔경도병’을 그렸다. 만경루를 앞쪽 배치하고 뒤에 청간정을 그렸는데 만경루는 바다를 조망하는 공간으로, 청간정은 객관 용도로 표현했다. 화면의 왼쪽과 위쪽에 여백을 두고 위쪽 여백에는 김극기의 ‘간성군역원 청간역’이라는 시를 적어 놓아 시문과 그림의 조화를 시도했다. 표암 강세황은 4박 5일 동안 금강산 유람을 했는데 ‘유금강산기’와 함께 ‘풍악장유첩’을 남겼다. ‘죽서루도’ ‘ 월송정도’와 함께 ‘청간정도’도 남겼다. 김홍도는 정조의 명을 받아 1788년 김응환과 함께 금강산과 영동일대를 기행하며 명승지를 그려 바쳤는데 ‘금강사군첩’이다. 여기에 ‘청간정’ 그림이 있다. 이밖에 이의성(1775~1883)의 ‘해산도첩’에도 ‘청간정도’가 들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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