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파도·모래가 만든 '세월의 절경'에 감탄사 절로
명사십리의 ‘명사’가 ‘곱고 흰 모래’가 아니라 ‘우는 모래’ 읽히는 곳이 고성 간성지방이다. 여기서 ‘명사’는 ‘울명(鳴)’자 ‘명사’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모래색이 눈같이 하얗고 사람과 말이 지날 때면 부딪쳐 나는 소리가 쟁쟁하여 마치 쇳소리 같다. 영동지방 바닷가 모래들이 모두 그러하지만 그중에서도 간성 고성 사이에 제일 많다” 대동여지도를 만든 김정호는 ‘대동지지’에 “청간정은 청간역 옆에 있으며 해안가에는 기암괴석이 어지럽게 서 있으며 해변 위 모래는 빛나니 흰 눈이 뒤덮인 것 같고, 밟으면 쇠가 부딪히는 소리가 나니 주옥을 밟는 것 같다”라고 썼다.
정자위에 앉아 하염없이 바라보면 물과 바위가 서로 부딪쳐 산이 무너지고 눈을 뿜어내는 듯한 형상을 짓기도 하고 갈매기 수 백 마리가 아래위로 돌아다니기도 한다. 그 사이에서 일출과 월출을 바라보는 것이 더욱 좋은데, 밤에 현청에 드러누워 있으면 바람 소리 파도 소리가 창물을 뒤흔들어 마치 배에서 잠을 자는 듯하다.
소소리 높은 정자 큰 길 베고 누웠구나
풍악산도 동해도 이곳에 다 모였어라
횡으로 금강산을 바라본다 굽어보는 동해바다
천만개의 옥봉우리 은은히 보이누나
여섯자라 일군파도 허공만 때리듯이
만물도 절대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네
외롭지 않은 이몸 그래도 즐거웁다
훌륭한 사람 하나하나 평론하기 어려워서
난간 밖 동쪽에서 서성이며 주저하네
- 이옥의 시 ‘간성의 청간정’
청간정은 아름다운 풍광 때문에 조선의 유명한 화가들을 모두 불러들였다. 정선과 김홍도 강세황도 이곳에 들러 그림을 남겼다. 겸재정선은 영조 9년(1733) 청하현감에 부임하여 삼척부사 이병연과 함께 청간정에 들러 회포를 풀면서 ‘청간정도’를 그렸다. 이 그림은 5년 뒤인 1788년 제작한 ‘관동명승첩’에 들어갔다. 허필(1709~1761)은 총석정 삼일포 청간정 경포대 죽서루 망양정 월송정 낙산사 등 관동팔경을 돌아보고 ‘관동팔경도병’을 그렸다. 만경루를 앞쪽 배치하고 뒤에 청간정을 그렸는데 만경루는 바다를 조망하는 공간으로, 청간정은 객관 용도로 표현했다. 화면의 왼쪽과 위쪽에 여백을 두고 위쪽 여백에는 김극기의 ‘간성군역원 청간역’이라는 시를 적어 놓아 시문과 그림의 조화를 시도했다. 표암 강세황은 4박 5일 동안 금강산 유람을 했는데 ‘유금강산기’와 함께 ‘풍악장유첩’을 남겼다. ‘죽서루도’ ‘ 월송정도’와 함께 ‘청간정도’도 남겼다. 김홍도는 정조의 명을 받아 1788년 김응환과 함께 금강산과 영동일대를 기행하며 명승지를 그려 바쳤는데 ‘금강사군첩’이다. 여기에 ‘청간정’ 그림이 있다. 이밖에 이의성(1775~1883)의 ‘해산도첩’에도 ‘청간정도’가 들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