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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가] 36. 의성 영천이씨 자암종택

오종명 기자 ojm2171@kyongbuk.com 등록일 2016년11월27일 17시47분  
자암종택 입구
산운마을은 의성군 금성면 수정리 금성산 아래에 위치한 450년 전통을 간직한 영천이씨 집성촌이다. 점곡면의 안동김씨 ‘사촌마을’과 더불어 의성의 대표적인 반촌마을로 꼽힌다.

이 마을 뒤편의 금성산을 싸고 감도는 구름의 모양이 신비해 ‘산운’이라 이름 붙여졌다. 산운마을은 용의 기운이 서여 있는 듯하고 닭이 알을 품고 있는 듯한 모습을 갖추고 있다. 이 마을은 과거 급제자와 인재가 많이 배출돼 ‘양반마을’ 또는 ‘대감마을’로 불려진다. 마을 곳곳엔 벼슬에 급제하면 심었다는 회나무가 집집마다 우거져 있다.

오늘날 영천(산운)이씨 가문의 번창은 1559년 이 마을에 입향한 학동 이광준이다.

평산 신씨 신권의 딸과 혼인하면서 처가인 산운으로 정착한 이광준은 가문에서 처음으로 문과에 급제하였을 뿐 아니라 강원도 관찰사에 이르렀다. 아들 민성과 민환 형제도 모두 문과 대과에 급제해 삼부자가 급제의 영광을 누렸다.

이민환의 아들 정상과 정기 역시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하면서 이 집안은 3대에 걸쳐 문과 급제자 5명을 배출한 명문가로 자리 잡았다. 조선중엽 3대의 가문 출신 다섯 명이 100여 년간 조선의 절반을 다스린 셈이다.

산운마을에 세거하는 영천이씨 집안에서 문과에 급제한 이들은 이광준(감사), 이민성(좌승지), 이민환(형조참판), 이정상(군수), 이정기(목사), 이희발(형조판서), 이장섭(교리) 등이 그들이다.

자암종택 안채와 초가채

명신으로 이름 떨친 자암 이민환

이민환(1573∼1649)은 자가 이장(而壯)이고 호는 자암(紫巖) 시호는 충간으로, 학동 이광정의 셋째로 산운에서 태어났다. 16세에 한성감시 초시에 급제하고 학봉 김성일의 문하가 되었으며 이후 서애 류성룡과 여헌 장현광과 학연을 맺었다.

그의 생애는 동아시아의 국제질서가 재편되던 불안정한 시기와 맞물려 있다. 20대에 임진왜란을 겪었고 40대에는 명나라의 요청으로 부원군의 종사관으로 요동지역 전장에 참전했다가 후금의 포로가 되어 온갖 고초를 받는다.

이때 그는 난중일기, 북경일기와 견줄만한 ‘책중일록’을 남겨, 오늘날 역사학계 귀중한 사료로 평가되고 있다. 17개월 동안의 포로생활을 일기 형태로 남긴 이 책은 조선 중기 광해군 대의 정치 상황은 물론 당시 조선과 명 후금 3국의 입장과 동향 등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사료다.

인조반정 후 고급사 홍명원은 북경에서 돌아와 조정에 보고하기를 “조선 문종사관 이민환이 나무울타리 속에서도 의절을 굽히지 않고 환송되니, 호인들이 이를 흠모하여 야야(아버지)라고 부르고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고 전했다.

자암은 1627년 정묘호란에서 공을 세웠으나 번번히 진출이 좌절되고 혼란한 시대 강직한 성품과 직언을 잘 하던 그는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62세에 향토역사지인 ‘문소지’를 이듬해 63세에‘박약집설’을 편찬했다.

‘박약(博約)’은 공자가 안자를 “문으로써 나의 지식을 넓혀주시고, 예로써 나의 행동을 단속하게 해주셨다.(博我以文 約我以禮)”고 한 것에서 나온 것이다. 후세에 공자 안자 퇴계 자암에 이어 포항공대 총장 무은재 고 김호길 박사가 ‘박약회’를 1988년에 설립한 배경이 되었다.

이민환은 조선으로 돌아온 후에도 정치적인 좌절기에 지식인으로서의 자기 역할을 묵묵히 수행했다. 그는 자신이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당대 현실에 대한 깊은 안목과 이해의 시각을 결부시켜 자료로 남긴 것이다. 이러한 기록들은 조선후기 실학파의 학문으로 계승된다.

자암은 국가에 대한 충성과 조정의 신뢰가 국난 극복의 힘이 되었기에 말년에 능력을 인정받아 정치적 복권을 이룬다. 66세에 이르러 비로소 당상관으로 진급하면서 10년간 의미 있는 관직을 거치게 된다.

72세 형조참판 73세 경주부윤 등을 역임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1649년 인조27년 4월 77세로 생을 마감했다.


삼부자 기리는 정사, ‘학록정사’
학록정사

산운마을 입구 들어서면 금성산을 배경으로 ‘학록정사’가 우뚝 서 있다. 입향조인 학동 이광준의 학덕을 추모하고 후학들을 양성하기 위해 1750년(영조26) 경에 건립한 서원이다. 이곳엔 그의 아들 민성과 민환의 위패도 뒤쪽 광학사에 함께 모셔져 있다.
삼부자 위패가 모셔진 광덕사 사당

학록정사 강당 대청 위에는 ‘거인(居仁)’과 ‘유의(由義)’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인에 거쳐하고’, ‘의를 따르는 것’ 산운마을 영천이씨 가에 대대로 내려오는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다.

매년 4월 첫째주 일요일에 이곳에서 삼부자의 제사를 올린다. 여타 종가와 달리 종가의 유지와 보종을 위해 책임을 나누는 것에 뜻을 모았다.

자암 이민환도 ‘자암종택제품정식’에서 “만약 옛날에 따르기만 하고 바꾸지 못한다면 고쳐서 바로 잡을 날이 영원히 없게 될 것이다”라고 했다.

학록정사에서 나와 마을 안으로 들어가면 자암종택이 있다. 한국전쟁 때 사당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훼손된 터라 현재 근래에 신축한 안채, 사랑채, 초가집이 ㄷ자로 서 있다. 간결한 구조가 자암의 살아온 삶을 말해주는 듯하다.
자암종택의 옛 문간채 자리를 설명하고 이시유 씨

14대 종손 이승진(75) 씨는 종부, 차종손과 서울에서 생활하고 있다. 현재 종택 관리는 이시유(75) 씨가 맡고 있다. 종손과는 동갑이지만 촌수로는 숙질간으로 높다. 이시유씨는 종손을 ‘똑똑하고 지혜로운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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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종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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