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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종호 호서대교수
긴 역사에 있어서 한 개인의 삶은 보편적인 이념으로부터 이끌려 나오지는 않는다. 특수한 이념에 충일한 삶을 사는 사람은 분명 정신과 사고가 그 이념에 지배를 받는 사람이다. 엄동설한 초입의 요즘 국민 모두가 군중심리에 따라 자신의 의지가 지배되지 않을까 걱정이 앞선다. 하인리히 폰 트라이치케는 국가의 본질은 권력에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작금의 우리 현실을 보면 일부 정치인들의 발언이 국가의 본질을 매우 협애화 시키고 있다. 왜냐하면, 수많은 소시민에게 대통령의 하야라는 명제를 외치도록 요구하며 권력의 본질을 조롱하고 비난으로 인도하여 통치자에게 국가의 근본문제를 소홀하게 했기 때문이다.

지난 주말을 지나면서 촛불집회는 드디어 횃불집회로 변질되었다. 이렇게 발전하면 급기야 촛불집회는 주최 측이나 참가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혁명의 수단이 될 수 있다. 야권과 진보세력들의 정치적 결단주의가 국가권력을 공격목표로 삼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론은 한결같이 평화시위로 평가하고 있다. 과연 그럴까? 서울 주요 도심에 모인 인파는 그것 자체가 공포요 폭력(Gewalt)이다. 한 지역의 평화를 교란한 것이기 때문이다. 군중들은 자신을 이른바 슈폰티(Sponti)라고 부른다. 자발적 행동파라는 뜻이다. 그러나 시민적 불복종을 앞세워 집회참여를 선동하는 세력도 있다. 폭력독점의 역사적 형성과정을 연구한 문헌은 국가형성 이전에는 누군가가 자신의 이익을 침해당한 경우에는 지퍼(Sippe)라고 불리는 파벌집단이 피더(Fehde)라고 하는 사적 폭력(私戰)을 이용한 자력구제를 실시하고, 명예를 회복하는 것이 원칙이었다고 한다. 특정 정치세력이 이와 같은 피더를 통한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달성을 꾀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근세 이후 원칙으로 자력구제는 금지되고 공적인 절차를 통한 분쟁해결을 지향한다. 그러므로 이제 정치권은 노도의 민심이 횃불로 번지기 전에 법적 절차로 정국을 풀어야 한다.

프리드리히 마이넷케는 권력의 본질을 선도 악도 아니고 더구나 윤리와는 무관한 자연의 것으로 규정하였다. 그는 권력은 폭력을 도구로 선악을 넘어 선다고 했다. 홉스적 단계에서 사람들은 우선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타파하고자 정당한 폭력을 독점하는 국가를 설립한다. 사인에 의한 폭력은 금지되고 시민은 평화의무를 지고 국가는 시민의 권리를 보호하는 임무를 맡는다. 홉스와 로크를 거치면서 근대 헌법에서 사법(司法)이라는 국가임무가 규정되게 되었다. 이렇게 폭력독점이 실현되고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은 종결되게 된다.

지난 주말 시국집회에서 봇물처럼 나타난 민심은 ‘불법행위에 대한 저항’이란 뜻이었다. 한 마디로 시민적 불복종 현상이다. 이것은 저항권과 마찬가지로 현실 권력자에 대해서는 불복종하겠다는 생각이다. 대통령이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반한 명백한 기도 등이 저항권 행사의 조건으로 제시되지 못했는데 이 주장에 동의할 수 있을까?

우리 국민은 식민주의 지배체제와 권위주의 시대에 법에 대한 ‘힘의 우위’를 경험했다. 그리하여 ‘힘없는 법은 환상이며, 현실에서는 곧 법 없는 힘에 이르리라’는 믿음을 갖고 있다. 완전한 사회적 평등이 실현되지 않은 현대에서 집단불만의 표출은 구조적 폭력론에 따르면 ‘평화’가 아닌 ‘내전’ 상태로서 파악한다. 이렇게 정치적 불만의 해소를 이유로 군중에 의한 대항폭력이 정당화되어 현재의 권력관계가 전복되면 혁명에 이르게 된다. 촛불시위의 행동이 우리 사회에서 어느 정도 수용되어 정당성을 획득해야지 그 결과 국가의 폭력독점이라는 근대국가 사상의 기초가 흔들려서는 곤란하다. 어떻든 군중 백만 명이 광장에 모인다는 것은 그 자체가 공포요 폭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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