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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동상] 물 한 잔

김광규씨, 제3회 경북일보 문학대전

경북일보 kb@kyongbuk.com 등록일 2016년11월28일 17시25분  
비가 오면 따스함이 그립다. 무언가에 이끌리듯 집을 나선다. 빌딩 숲을 벗어나 붉은 벽돌 담장을 따라 한없이 걷는다. 어느 집 처마에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가 담 너머로 들려오던 어머니의 다듬이 가락 소리처럼 정겹다. 이렇듯 비 오는 날 고샅길을 거닐면 기억의 저편에서 잠자고 있던 추억의 흔적들이 한 올 한 올 되살아난다.

얼마나 걸었을까. 골목길 저만치에서 빗속으로 급히 뛰어가고 있는 신문팔이 소년의 모습이 슬라이드 필름처럼 스쳐 지나간다. 옆구리에서 삐져나온 한 아름의 신문 더미가 곧 쏟아져 내릴 것 같다. 반쯤 흘러내린 바지춤을 연신 추스른다. 훌쩍거리는 코를 소매로 닦으며 골목길을 누빈다. 슬그머니 소년의 흔적을 따라가 본다.

초등학생 무렵엔 내남없이 가난을 전염병처럼 안고 살았다. 도시 변두리의 허름한 문간방에 세 들어 살던 우리 가족도 끼니때마다 쌀독의 안위를 먼저 걱정해야만 했다.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찬바람도 들어올 틈이 없는 골목 어귀에는 아이들이 전선에 앉은 참새처럼 늘 복작거렸다. 아침을 거르고 나온 날은 어김없이 얼기설기 포개 올린 블록 담에 축 늘어져 해바라기로 끼니를 때웠다. 친구들과 구슬치기, 딱지치기 놀이를 하다 허기를 참을 수 없으면 우물가로 달려갔다. 마음껏 먹을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 우물물뿐이었다.

친구들은 뒤돌아서면 배가 꺼지는 우물물에서 벗어나기 위해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 했고, 만식이 아버지처럼 쌀가게 주인이 되는 것이 꿈이었다. 빨리 어른이 되려면 굶주림에도 의젓해야 하는 줄 알았다. 두레박으로 물 한 바가지를 길어 올려 들이키고는 아버지처럼 손으로 입을 한번 쓰윽 닦으면 그만이었다.

어느 날 친구가 배고픔도 해소할 수 있고 용돈도 벌 수 있는 곳이 있으니 같이 가보자고 유혹을 했다. 십리 길을 오가야만 하는 거리에 있는 조그만 신문지국이었다. 몇 달간 이를 악물고 일을 했지만 처음 기대와는 사뭇 달랐다. 신문사에서조차 우리를 비렁뱅이 취급했다. 일만 부려먹고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약속한 월급을 주지 않았고, 적선하듯 동전 몇 푼 던져주는 것이 전부였다. 월급을 받으면 어머니에게 꽃고무신과 동생들에게 달콤한 사탕을 사주겠다던 내 기대는 산산이 조각나고 말았다. 힘도, 기운도 없는 나로서는 지국장이 억압하는 대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끼니를 때울 수 있는 신문 한 부가 내게 주어져 근근이 버틸 수 있었다.

누구에게도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스스로 이겨내야 하는 커다란 벽이었다. 가끔 신문을 몇 집씩 걸렀다. 그렇게 하면 밀린 월급을 받을 수 있으리라 여겼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심한 욕설과 손찌검만이 돌아왔다. 반항하면 할수록 내 마음의 상처만 하나 더 보탤 뿐이었다. 점점 벽을 이겨낼 수도, 벗어날 수도 없다는 조바심이 어린 가슴을 옥죄어 왔다. 어른이 되기 싫었다.

하굣길에 강한 바람과 함께 작달비가 쏟아졌다. 여느 때와 다르게 신문을 하나하나 비닐로 돌돌 말아 어깨에 동여맸다. 비 때문에 내게 주어진 신문 한 부를 팔지 못했다. 모락모락 김이 나는 풀빵 집 앞을 서성이다 그냥 돌아선다. 허기진 배를 움켜잡고 비바람을 맞으며 이 골목 저 골목을 누빈다. 어느새 철옹성 같은 높은 담벼락 위에 철조망이 둘러친 집 앞이다. 지나가는 바람도 가를 것 같은 깨진 유리병이 철조망 사이에서 뾰족하게 나와 나를 노려본다. 이곳에는 도대체 어떤 사람이 사는 것일까. 늘 그러하듯이 더욱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긴다.

“야! 인마, 이리와!” 느닷없는 고함에 육중한 철문 앞을 바라본다. 양복 차림에 배가 불룩 나온 아저씨가 팔짱을 끼고 날카롭게 나를 쏘아본다. 담장 너머엔 내가 제일 무서워하는 진돗개가 미친 듯이 짖어댄다. “이 거지 같은 새끼야!” 내가 엉거주춤 다가서자 아저씨는 다짜고짜 따귀를 갈긴다. 솥뚜껑 같은 손바닥이 연거푸 날아든다. 눈에 번개 불이 번쩍하더니 내 몸은 이내 저만치 나가떨어진다. 쓰러진 내 몸 위로 분노가 가득 찬 발길질도 해댄다.

한 번 더 그러면 목을 비틀어 버린다며 으름장도 놓는다. 어제 배달한 신문이 뒤늦게 내린 비 때문에 흠뻑 젖어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높은 담벼락은 변명할 기회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시퍼렇게 든 멍은 며칠이면 아물겠지만, 살균되지 않은 폭언과 벌레를 보는듯한 눈빛은 나를 아득한 땅끝으로 내몬다.

늘 친구 같던 골목길이 낯설고 메말라 보인다. 저만치 내팽개쳐 있던 너덜너덜한 운동화를 집어 든다. 빗줄기는 빛바랜 홑겹의 옷 속으로 가차 없이 뚫고 들어온다. 어기적어기적 막다른 골목길로 접어든다. 저만치서 체육복 차림의 조금 말라 보이는 아저씨가 팔짱을 끼고 나를 뚫어지게 보고 있다. 도망가고 싶지만, 발이 마구 허방을 짚는다. “어이! 학생 잠깐만.” 아저씨가 다급하게 나를 불러 세운다. 욱신거리는 옆구리를 부여잡고, 블록 담장을 손으로 더듬거리며 는적는적 다가선다.

“비가 억수 같이 오는데 어린 것이 고생이 많구나. 어제는 신문이 다 젖었더구나. 갑자기 비가 내려 미처 대처를 못 한 모양이지.” 아저씨는 아주머니에게 뜨거운 물 한 잔을 내어오라고 하신다. “니가 아직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고생은 사서도 한단다. 실망하지 말고 기운을 내거라.” 아저씨는 고개만 푹 숙인 채 오들오들 떨고 있는 내 등을 토닥이며 물 한 잔을 건넨다. 무슨 뜻인지 잘 몰랐지만 나를 위로해주는 말이었다. 파르르 떨고 있는 물잔 위로 눈물이 한 방울 뚝- 떨어져 내린다. 풀빵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다는 것도 그때 처음으로 알았다.

조탁彫琢 되지 못한 언어의 폭행 속에서 받아든 한 잔의 물이 굳어있던 마음의 벽을 허물고 있었다. 뒤돌아 나오는 골목길이 신작로처럼 넓어졌다. 몇 번이나 뒤를 돌아다봤다. 아저씨는 그 자리에 오랫동안 나를 쳐다보며 서 계셨다.

‘나도 얼른 어른이 되어야지.’

우물물이 배고픔을 해결해주던 생명수生命水라면 그 한 잔의 물은 고향의 당상 나무처럼 내면의 갈증을 해결해주는 정신수精神水가 아니었을까. 십 리를 걸어 신문 본사까지 찾아갈 용기를 주었고, 밀린 월급도 일부분 받아낼 수 있었다. 일어서면 머리가 부딪치는 다락방 같은 삶 속에서도 허리를 곧추세울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한잔의 물이 가슴 속을 따뜻하게 맴돌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발걸음은 어느새 골목 어귀 찻집 앞에 다다랐다. 뜨거운 커피 잔 속에는 어느덧 중년이 된 남자가 가벼운 미소를 짓는다. 오늘은 비바람 속에서 뜨거운 차 한 잔으로 기억 속의 묵은 담장을 헐어낸다. 신문 배달을 마친 소년은 옷깃을 여미며 대문 안으로 성큼 들어선다. 툇마루에서 다듬이질하던 어머니는 우산을 찾아 급히 마당으로 내려선다. 소년의 허리춤에는 꽃고무신과 눈깔사탕이 빼꼼히 고개를 내민다.

■당선 소감

김광규씨= 2014년 공무원문예대전 수필부분 은상, 제5회 경북문화체험 전국 수필대전 입선, 제2회 경북일보 문학대전 가작.
떨어지는 낙엽을 보며 나무의 생각과 생이별을 해야 하는 나뭇잎의 생각이 어떤 것일까. 아울러 화자와 타자와의 관계. 인간과 사물과의 관계를 생각해봅니다. 그들은 서로에게 어떤 지배를 하고 또 받는 것일까.

문득 내 속에는 무엇이 나를 지배하고 있는 걸까. 원천적인 물음을 해보지만, 무릎을 탁 치게 하는 명쾌한 대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사회생활을 영위하는 사람과의 사이 연결고리로는 그 진위를 찾기가 더 힘듭니다.

시들어 가는 낙엽처럼 내 감정의 모든 것이 메말라 갈 때 비로소 내 속을 지배하고 있는 심연에 닿을 수 있으리라. 그것이 한 잔의 물이었습니다. 어른이 되면 유치할 것 같던 그 감정이 나의 삶의 원천이었던 같습니다. 앞으로도 나를 지탱하고 있는 그 감정은 변함이 없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수필을 통해서 긍정적인 에너지들이 쌓여 갑니다. 나와 타인, 나와 사물, 나와 내 마음 사이에 켜켜이 막아서고 있던 응어리들이 실타래가 풀리듯 치유가 되어 갑니다. 지나온 서툰 길을 오늘은 기쁜 마음으로 되돌아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문학을 사랑하시는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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