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상대사가 좌선하던 곳을 기념하여 지은 의상대 정자.
추사 김정희는 미식가였다. 제주도 유배의 와중에도 아내에게 편지를 보내 곶감 김치 젖무 산채 고사리 소로장이 약식 두릅 새우젓 조기 볶은 고추장 민어 같은 음식을 보내달라고 편지를 썼다. 친구인 초의선사에게도 차를 보내달라고 재촉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그의 조카 상일이 양양부사로 부임했다. “큰바다가 앞에 가로질러 있어 푸른 고래와 붉은 게는 너의 소유이고, 방어와 연어도 돈을 따지지 않을 것이니, 이것이 어찌 집에서 먹는 사람에게 있을 수 있는 일이겠느냐. 나같은 노탐은 벌써 입 언저리에 침을 흘리면서 봄 방어를 한껏 먹으리라 자부하는 마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다. 다시 너를 위하여 구복을 축하하노니, 능히 자잘한 알이 붉은꼬리(방어)로 바뀐다며 어찌 집게손가락이 크게 움직이지 않겠느냐”.
의상대 아래 해안가에서 올려본 의상대

조선의 문장가 강희맹은 “큰 들녘 동쪽 끝에 바다 해를 보고, 긴 숲 일면에 강 하늘이 보인다”고 썼다. 남대천은 오대산과 구룡령에서 발원한 물이 만나 큰 하천을 이루어 동해로 흘러가는 강이다. 봄에는 황어, 7~8월에는 은어, 10~11월엔 3~5년 동안 자란 연어떼가 모찬 회귀하는 곳이다. 설악산 대청봉과 한계령, 오색주전골 같은 대한민국 최고의 산악비경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조선의 하륜과 조준이 만년에 청유하던 곳, 하조대의 비경도 빼놓을 수 없는 양양의 자랑이다. 이렇듯 양양은 아름다운 경관과 풍성한 먹거리가 지천이다. 장관 아닌 곳이 없고 맛있는 음식이 나지 않는 곳이 없다.

양양의 비경 중에 낙산사 의상대를 뺄 수 없다. 의상대는 강원도 영양군 강현면 전전리, 낙산사 동쪽 해안 절벽 위에 있다. 신라 의상대사가 낙산사를 창건할 때 푸른 바다를 바라보며 좌선하던 곳이다. 관동팔경의 하나이며 동해안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출을 연출하는 비경이기도 하다. 의상대를 호위하듯 절벽 끝에 아찔하게 서 있는 소나무, 관음송도 ‘그림’이고 의상대에서 내려다 보는 북쪽 산자락 끝 바다와 맞닿은 홍련암도 한 컷의 ‘사진’이다. 파도소리 청량한 절벽을 끼고 홍련암까지 걸어가는 200여 미터 벼랑길은 장엄하기 까지 하다.

북쪽 산자락 끝의 홍련암은 낙산사 창건의 히든 스토리가 담겨져 있는 곳이다. 661년 당나라에 유학을 갔던 의상대사는 10년만인 671년(문무왕1) 신라로 돌아와 관음보살 진신이 산다는 어느 굴을 찾아왔다. 설악산이 동해쪽으로 뻗어내려 다섯봉우리를 이뤄 오봉산이라고 하는데 삼국유사는 이곳을 낙산이라고 했다. 관음보살이 사는 곳을 서역(인도)에 있는 보타낙가산이라고 하는데 이를 줄여 말한 것이다.
의상대사가 관음보살을 만나 홍련암

의상은 관음보살을 친견하기 위해 굴 입구에서 7일동안 기도를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물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팔부신중이 나타나 의상을 굴속으로 안내했다. 거기가 관음굴이다. 동해용을 만나고 또 7일을 더 기도를 올리니 관음보살이 나타나 한 말씀 하신다. “그대가 앉은 자리의 산마루에 한 쌍의 대나무가 솟아날 터이니 그 자리에 불전을 짓는 것이 마땅하다”

의상은 쌍죽이 솟은 자리에 절을 짓고 관음보살을 모신 뒤 낙산사라 이름했다. 의상이 관음보살을 처음 만난 곳에 암자를 지었는데 홍련암이다. 의상대사는 의상대에서 관음보살을 만난 홍련암을 내려다 보며 좌선을 했을 것이다. 좌선을 풀고서는 낙산사 건축공사를 지켜보거나 멀리 동해바다 일출을 보며 아름다운 경관에 감탄했을 지도 모르겠다.

홍련암은 원효대사의 실패 스토리가 전해지는 곳이기도 하다. 삼국유사는 의상과 원효를 나란히 등장시키고 귀족출신인 의상에게는 성공스토리를, 신라의 ‘듣보잡’인 원효에게는 낭패의 사례를 전한다. 신라 불교의 투톱이었던 원효도 의상이 관음보살을 만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한발 늦었지만 관음보살을 만나는 일이다. 낙산을 찾았다. 그런데 관음보살은 원효를 자꾸 시험에 들게 한다. 원효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허방만 친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그 장면을 재구성하면 이렇다.
의상대안에서 본 관음송. 멀리 홍련암이 보인다.

원효가 양양 근처에 이르렀을 때 흰옷을 입은 여자가 벼를 베고 있었다. 원효가 희롱삼아 여자에게 “벼를 줄 수 없겠는가”하고 물었다. 이미 요석공주와 결혼을 하며 파계한 원효였다. 그가 달라고 한 벼가 무엇이겠는가. 혹시 하룻밤 잠자리는 아니겠는가. 여자가 대답하기를 “벼가 아직 익지 않았습니다”했다. 너는 아직 멀었다. 그런 뜻은 아닐는지. 다시 가다가 다리 밑에서 빨래를 하는 여인을 만났다. 빨래는 월수백(月水帛.여자의 서답)이다. 여자가 피묻은 서답을 빨고 있는 원효는 천연덕스럽게 마실 물을 좀 달라고 했다. 여자가 서답을 빨던 더러운 물을 떠주자 원효는 그 물을 쏟아버리고 깨끗한 물을 떠 마셨다. 그때 소나무에서 파랑새가 날아오르며 ‘제호스님은 쉬세요’라고 소리치며 날아올랐다. 이 장면에서 관음보살을 원효에게임아웃을 선언했다. 새가 떠났던 소나무 밑에 신발 한쪽이 떨어져 있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원효가 낙산에 도착했을 때 관음상 신발의 다른 한쪽이 놓여져 있었다. 그제서야 원효는 베를 베던 여인과 빨래하던 여인이 관음보살의 화신임을 깨달았다. 관음보살이 있다는 굴에 들어가려 했으나 풍랑이 쳐 들어가지 못했다.
의상대와 의상대를 호위하는 듯 서 있는 관음송

의상대 정자는 1925년 의상대사의 좌선터를 기념하기 위해 낙산사 주지 김만옹스님이 세웠다. 그후 폐허가 됐다가 1957년 중건했다. 2005년 낙산사 화재 당시에도 의상대와 홍련암을 화재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한다. 의상대와 관련한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에 나온다. 선조 36년(1603) 3월에 강원도 관찰사 박동량이 조정에 보고한 내용이다. 양양부에 둘 두 개가 바다 속에서 나와 의상대 아래 가루 누워있는데, 예전에는 돌에 푸르거나 검은 이끼가 끼어 있었으나 최근에는 백분을 바른 것 같이 색이 유난히 하얘졌다는 것이다. 벌써 그 당시에 백화현상이 있었던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조선시대에 이미 의상대가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홍련암

기록에 나오는 ‘대’가 높은 바위를 지칭한 것인지, 그 당시에 정자가 있었던 것인지를 확인 할 수 없다. 다만 정철이 관동별곡에서 “의상대에 앉아 일출을 보리라‘고 노래한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에도 의상대의 일출은 선비들의 버킷리스트 중의 하나였던 모양이다. 송강은 해돋이를 보려고 이른 새벽에 일어나 의상대에 올라 일출을 보고 장관을 노래했다.“배꽃은 벌써 지고 소쩍새 슬피 울 때 / 낙산 동쪽 언덕으로 의상대에 올라 앉아 / 해돋이를 보려고 한 밤중에 일어나니/ 상서러운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듯 / 육룡이 해를 떠받치는 듯 / 바다에 떠오를 때는 온 세상이 울리더니 / 하늘 위에 해가 뜨니 터럭 한올 조차 셀수 있겠구나 / 혹시 어두운 구름이 근처에 머무를까 걱정이네 /시선은 어디가고 싯구만 남았는가/천지간 장안소식 자서하기도 하구나”
의상대에서 내려다본 동해

의상대는 평일인데도 관광객들로 북적인다. 의상이 좌선했던 의상대에 올라 의상의 시선으로 좌우를 둘러본다. 바다는 끝간데 없고 파도소리는 날이 서 있다. 절벽위에 몸을 맡기고 있는 홍련암은 위태로워보인다. 파도가 칠 때 마다 물결이 암자를 집어삼키지 않을까 두렵지만 파도는 암자의 다리만 살짝 적시고 되돌아섰다가 돌아왔다. 사람들은 정자에 올라 사진을 찍거나 홍련암 가는 절벽 포토존에서 셀카로 여행의 흔적을 남기기에 여념이 없다. 홍련암 가는 길의 산등성이에는 빛바랜 해국이 쓸쓸해 보인다. 해국이 조곤조곤 속삭였다.
▲ 글·사진
김동완 자유기고가

벼랑에 기댄 천년의 나무
허공에 솟은 백 척의 누대
신승은 떠나 자취마저 없는데
구름 밖에는 학만 오락가락 하네

- 석수초의 시 ‘의상대’



김동완 자유기고가
서선미 기자 meeyane@kyongbu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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