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취당 전경
△ 3명의 정승 태어 날 형세 ‘사촌마을’

의성군 점곡면 사촌마을은 안동 김씨, 풍산 류씨들이 세거하는 유서 깊은 선비 마을이다. 조선 중기의 명재상 서애 류성룡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점곡면은 사과로 유명하다. 사촌(沙村)인 까닭은 모래가 많기 때문이다. 이 마을에 사과나무가 많은 것은 사촌은 모래밭에 사는 과일을 의미하는 사과(沙果)와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

600여년 내력을 지닌 마을에는 아름다운 숲과 30채에 이르는 옛 한옥들이 즐비하다. 마을 서쪽에는 천연기념물(405호)로 지정된 ‘사촌리 가로숲’이 마을의 역사와 함께 하고 있다.

사촌의 가로 숲은 고려말 안동김씨 중시조인 충열공 김방경의 5세손 김자첨(金子瞻)이 안동 회곡에서 이곳으로 오면서 만든 것이다. 그는 ‘서쪽이 허하면 인물이 나지 않는다.’는 풍수설에 따라 샛바람을 막아 삶의 터전을 보호해줄 숲을 조성했다. 작은 도랑 주위에 조성된 숲은 800여m에 달한다.

사촌마을은 풍수지리적으로 3명의 정승이 태어날 형세라고 한다. 신라 때 이미 ‘나 천업’이 나왔고, 풍수상 두 번째 정승인 류성룡이 이 마을에서 태어났다. 마을 사람들은 이어 정승 1명이 더 배출된다고 믿고 있다.

마을 입구에는 ‘의성의병기념관’이 자리 잡고 있어 사촌마을이 겪은 고된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만취당’의 기품
한석봉의 글씨체로 알려진 당호

만취당은 김사원(金士元, 1539-1602)이 1579년(선조12) 학문을 닦고 후진을 양성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당호는 한석봉의 글씨체로 알려져 있고, 만취당은 성리학자 김사원의 지조를 상징한다. 늙어서도 지조를 바꾸지 않는다는 ‘만취’는 조선의 성리학자들이 선호한 당호 중 하나였다. 이 건물은 안동김씨 집성촌 사촌 문중의 상징물이자 자존심이기도 하다.

조선조 특유의 11칸 대청 건물로 안동 봉정사의 극락전, 영주 부석사의 무량수전에 이어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민가의 목조 건물로 임란 이전의 건축양식을 보여주는 중요한 건축물 중의 하나이다. 2014년 보물 제1825호로 지정돼 보수했다.
보물 제1825호 만취당

다행히도 임진왜란, 병자호란, 병신병란, 6.25전쟁 등 역사 전환기를 거치면서 불타지 않았다. 또 한 번도 해체 복원되지 않고 원형대로 보존해온 우리나라에서도 손꼽히는 유가의 보물이다.

▲ 수령 500년 된 ‘만송정’ 향나무
만취당 옆에는 수령 500년 된 향나무가 서있다. 송은처사 김광수가 심은 나무다. 절조를 지킨다는 뜻으로 ‘만년송’이라 이름 지었다. 그 뒤 의성지역에 군수나 현감이 부임하면 만연송의 안부를 물었을 정도였다고 하니, 높은 벼슬을 하지 않았던 만취당 주인의 인품을 짐작할 수 있다.

서애 류성룡은 묘갈문에서 그를 한평생 온화한 마음을 가져 어진 자나 어리석은 자 모두가 존경했으며 ‘독행군자’라 하였다.

조선후기 눌은 이광정은 행장에서 그를 부귀와 명예를 버리고 고향에 돌아온 중국 진나라 도연명과, 고려 3은 중 한 사람은 길재에 비유했다.



△국난 땐 의병 일으키고 가난한 이 구제

만취당 종가 사람들은 600여 년 동안 터를 잡고 살면서 높은 벼슬을 한 이가 드물다. 하지만 한 집안에서 대과 13명, 소과 31명이 급제하는 등 영남에서는 학문을 숭상하는 명문 집안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나라가 어려울 땐 만취당 사람들은 분연히 떨쳐 일어섰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만취당 3형제는 나란히 창의해 나라 위한 충절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김사원은 의성정제장에 추대되었고, 전쟁 중 흉년이 계속되자 개인 창고를 열어 빈민을 구제했다. 그는 부녀자가 오면 꼭 의관정제를 한 다음 구휼했다고 전한다. 마을 사람들은 이를 ‘김씨의창(金氏義倉, 김 씨의 의로운 창고)’이라 불렀다.

또 양식을 꾸러 오면 차용증을 쓰게 했는데 갚지 못하고 토지문서를 가져왔을 때는 그 자리서 차용증서를 찢어버렸다. 그러면서 “차용증을 쓴 것은 빌려간 곡식을 갚는데 게으르지 마라는 뜻이지 논밭을 뺏기 위함이 아니다.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느냐”라고 위로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사촌마을 입구 의성의병기념관

사촌마을은 임진왜란, 정묘호란,무신란, 한말 병신의병 등 수많은 역사 전환기 때 마다 의성의병의 중심지가 됐다. 1996년 문중에서는 만취당 남쪽 잔디밭에 ‘병신병란백주념비’를 세우고, 황산전투에 참여한 후손들은 2009년 마을 입구에 ‘병신창의기적비’를 세워 나라를 지키다 가신 님들을 추모하고 있다. 또한 의성군도 이 마을 입구에 ‘의성의병관’을 건립했다.



△만취당 14세 종손 김희윤 씨
만취당 김사원 김희윤 종손

만취당 김사원의 14세 종손 김희윤(66)씨는 선조들이 지켜온 유훈을 받들어 몸소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게 집안의 내력이라 한다. 지금은 의성에서 가까운 대구 딸네 집에서 잠시 겨울을 지내고 있다. 이틀간 만취당에서 문중회의가 있어 만날 수 있었다.

“무자기(無自欺) 즉 ‘스스로를 속이지 말라’는 만취당 선조의 뜻대로 살려고 노력합니다.”

종손은 마을 입구에 새겨진 ‘충의유향’이란 말처럼, 나라가 어려울 때 일어서고, 베푸고 나누는 삶을 사는 게 600여 년 지켜온 사촌 문중 선조들의 덕에 보답하는 일이라 말했다.

만취당 높은 마루




오종명 기자
오종명 기자 ojm2171@kyongbuk.com

안동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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