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고구려 건국 궁예, 난세의 영웅인가 폭군의 표상인가

▲ 철원북방 DMZ 태봉국도성터

현 시국의 민심은 새 나라를 원한다. 양당 정치체제의 기득권 밖에 없는 현실이 이를 가로막고 있다. 난세에 새 나라를 건국한 궁예를 다시 찾게 된다. 왕건은 궁예 왕의 자리를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찬탈했다. 분명한 것은 궁예가 없었다면 왕건이 고려를 세우기는 힘들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최근 들어 DMZ 부근에 남아 있는 태봉의 유적지인 궁예 도성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강원도 철원군은 궁예왕이 철원에 태봉국을 건국한 1천 100주년을 맞아 기념우표를 발행했다. 궁예와 그가 세운 나라 태봉은 신라나 고려에 비해 역사가 짧기도 하지만, 승자에 의해 저술된 기록들 때문에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당시 신라 수도 서라벌(현 경주시 일대)사람 궁예에 관해 국내에서 객관적인 평가를 하고 있는 전문가의 글을 싣는다. 

▲ 궁예도성지석등.
궁예(弓裔, 857~918, 재위 901~918)는 진골의 집안에서 태어나 모진 인생역정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타고난 힘과 재주로 사람을 모아 드디어 후고구려를 세우는 왕이 되었다. 그는 살아있는 미륵으로 자처했으며, 관심법(觀心法)이라는 특유의 술책으로 사람들을 휘어잡았다. 그것이 지나쳤을까, 드디어 부하인 왕건에 의해 내몰려져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그는 과연 난세의 영웅일까, 악한 군주의 표상일까.

혼란한 시기, 스스로 미륵이라 부르며 나타나는 이들은 대체로 이 신앙에 바탕을 둔 것이다. 우리 역사상 미륵을 자처한 두드러진 예로 궁예를 들 수 있다. 901년에 개성에서 후고구려를 연 바로 그이다.

궁예가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던 것이 관심법(觀心法)이었다. 사람의 마음을 읽는다는 것이다. 그가 애써 이룬 공업을 물거품으로 만든 것도 이 관심법이었다.

궁예는 자신이 가장 신뢰하던 왕건(王建)에게도 예의 관심법을 들이댔다. 반역을 모의하였다고 다짜고짜 윽박지르며, “관심법으로 이 일을 말하겠다.”라고 하였다. 왕건을 아끼던 최응이라는 사람이 귓속말로 불복하면 위태롭다고 일러주었다. 그때야 분위기를 알아챈 왕건이 반역을 꾀했다고 하며 무릎 꿇었다. 궁예는 크게 웃으며 정직하다고 칭찬하며, 금은으로 장식한 안장과 고삐까지 내려 주는 것이었다. 눈치 빠른 왕건이 살아나는 순간이었다.

미륵으로 자처하며 세상을 구하겠다고 나선 궁예의 최후는 이 뒤에 바로 이어 온다. 기왕 악행을 일삼자면 왕건 또한 살려두어서는 안 되었다. 궁예는 바로 그 왕건에게 죽임을 당했기 때문이다.

▲기구한 운명의 영웅

궁예는 신라 진골 귀족 출신으로 보인다. 헌안왕 또는 경문왕의 아들이라는 말도 있으나 진골 가운데서도 몰락하여 지방으로 흩어진 집안의 후손이 아닐까 여겨진다. 집안 못지않게 출생과 성장과정은 더욱 비극적이다. 외가에서 태어난 궁예는 다락 밑으로 던졌는데, 마침 젖 먹이던 종이 아이를 몰래 받아 들다가 잘못하여 손으로 눈을 찔렀다. 그래서 한쪽 눈이 멀었다. 종은 아이를 안고 도망하여 숨어서 고생스럽게 길렀다. 나이 10여 세가 되어도 장난만 치자 종이 그에게 말했다.

“네가 태어났을 때 버림을 받았다. 나는 이를 차마 보지 못하여 오늘까지 몰래 너를 길러 왔다. 그러나 반드시 남들에게 알려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나와 너는 함께 화를 벗어나기 힘들 터, 이를 어찌하겠느냐?”

궁예는 길러준 어머니의 곁을 떠나기로 하였다. 울며 밤길을 걸어 그가 도착한 곳이 세달사. 세달사는 나중에 흥교사로 이름을 바꾸었는데, 강원도 영월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어 스스로 선종(善宗)이라 불렀다.

명성산

▲난세에 꽃핀 궁예의 능력

기구하게 태어난 영웅은 제가 받은 힘으로 난관을 헤치기 마련이다. 궁예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그는 일개 승려로 살아갈 사람이 아니었다. [삼국사기]에서는 그를 ‘승려의 계율에 구애받지 않는 뱃심’이 있었다고 평한다. 그러면서 이런 일화를 소개한다. 어느 날 재를 올리러 가는 길, 까마귀가 점치는 산가지를 물고 와서 궁예의 바릿대에 떨어뜨렸는데, 거기에는 왕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었다. 궁예는 아무에게도 이 말을 하지 않고, 적이 자부심을 품고만 살았다. 그에게는 일찍이 이렇게 왕의 꿈이 심어졌다.

다행히(?) 시대는 어지러웠다. 특히 그가 세상에 나갈 마음을 먹은 진성여왕 5년(891) 무렵, 조정에서는 유력한 신하들간에 패가 갈리고 도적은 벌떼처럼 일어났다. 절을 나선 궁예는 처음에 기훤(箕萱)의 휘하로 들어갔다. 그러나 기훤은 오만무례하였다. 이듬해 양길(梁吉)을 찾아갔다. 양길은 그를 우대하고 일을 맡겼으며, 군사를 주어 동쪽으로 신라의 영토를 공략하게 하였다.

그러나 궁예가 출중한 솜씨를 발휘하여 우두머리로 올라서는 데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절문을 나선 지 3년 만인 894년, 궁예는 강릉을 거점으로 삼아 무려 3천5백 명 이상의 대군을 편성하였다. 이때 그는 ‘사졸과 함께 고생하며, 주거나 빼앗는 일에 이르기까지도 공평무사하였다.’라고 [삼국사기]는 전해 준다. 당연히 사람들은 그를 마음속으로 두려워하고 사랑하여 장군으로 추대하였다.

궁예가 미륵보살을 자처하는 시기가 이즈음일 것이라고 말하는 연구자도 있다. 이때의 미륵보살 궁예는 곤궁한 신라 말의 백성에게 그야말로 미륵 같은 존재였다.

세력이 커지자 태백산맥을 넘어 철원으로 그 거점을 옮겼다. 거기서 왕건이라는 부하를 얻었다. 본디 개성 출신인 왕건은 철원으로 와 896년부터 궁예의 휘하에서 혁혁한 전공을 올렸다. 왕건에 대한 호감 때문이었을까, 궁예는 개성이야말로 한강 북쪽의 이름난 고을이며 산수가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시 도읍을 개성으로 옮겼다.

궁예의 거침없는 기세 앞에 불편해진 이가 양길이었다. 양길은 궁예의 힘을 꺾어놓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선수를 친 것은 도리어 궁예였다. 이제 그는 왕이었다. 드디어 901년, 왕을 자칭하며 사람들에게 말했다.

“이전에 신라가 당 나라에 청병하여 고구려를 격파하였기 때문에, 평양의 옛 서울이 황폐하여 풀만 성하게 되었으니, 내가 반드시 그 원수를 갚겠다.”- [삼국사기]

궁예의 일생 최전성기에 후고구려는 이렇게 세워졌다. 견훤이 남쪽에서 후백제를 세운 1년 뒤의 일이었다.

▲전제적 신정주의자가 가야할 길

궁예의 통치를 전제적 신정주의라고 명명한 연구자의 견해를 따르자면, 신정이었기에 백성의 신임을 얻었고, 전제였기에 백성에게 버림받은 이가 궁예였다고 할 수 있다. (조인성 [태봉의 궁예정권], 푸른역사, 2007) 엄청난 성공 끝의 피로감을 그는 끝내 이겨내지 못한 것일까. 904년에 국호를 마진(摩震)이라 하고 연호를 무태(武泰)라 하였으며, 사람들에게 신라를 멸도(滅道)라고 부르게 하였고, 신라에서 오는 사람은 모조리 죽여 버렸다. 911년에는 연호를 수덕만세(水德萬歲), 국호를 태봉(泰封)이라 고쳤다.

그런 그에게 반기를 든 이들이 지방의 호족이었다. 그들은 궁예에게 바치기로 한 충성을 슬그머니 거둬들였다. 엉뚱한 관심법으로 언제 파리 목숨 취급을 할지 모르는 그 군주 뒤에서 살 길을 찾아야 했다. 제 자랑만 떠벌리는 불경 20여 권을 짓자, 석총이라는 용감한 승려가 요사스럽고 괴이한 이야기라 독설을 퍼부었다. 궁예는 석총을 철퇴로 쳐 죽였다. 무력으로
▲ 고운기 한양대 교수
입을 막았으나, 이로말미암아 자신의 주요한 배후세력인 승려들이 등을 돌리고 말았다.

그러는 사이에 새롭게 떠오른 이가 왕건이었다. 왕건은 자신의 군주가 저지르는 실수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지방 호족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고, 군주의 도덕심과 자비로움을 잃지 않으려 애썼다. 그에게는 궁예가 반면교사였던 셈이다.

드디어 918년 6월이었다. 홍유·배현경·신숭겸·복지겸 등은 왕건은 어지러운 임금을 폐했다. 왕건의 나라인 고려 사람이 기록한 ‘삼국사기’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궁궐 앞에서 왕건을 기다리는 이가 1만여 명을 넘었다 한다. 혁명은 성공했다.

고운기 한양대 교수
조현석 기자 cho@kyongbuk.com

디지털국장입니다. 인터넷신문과 영상뉴스 분야를 맡고 있습니다. 제보 010-5811-4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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