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이 없으면 과자를 먹어라” 1789년 프랑스는 보리 흉작으로 빵값이 폭등, 식량 폭동이 일어났다. 군중들이 궁전으로 몰려와 빵을 달라고 요구하자 루이 16세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군중을 향해 내뱉은 응답이었다.

혁명이 발발, 루이 16세와 함께 파리에 유폐된 앙투아네트는 친정인 오스트리아 왕국과 연락, 국외 탈출을 시도했다. 앙투아네트는 탈출 준비를 자신의 정부인 페르젠 백작에게 맡겼다. 탈출계획을 면밀하게 세운 페르젠 백작은 탈출로를 물색하던 중 한가지 묘안이 떠올랐다.

자신이 왕비 앙투아네트와 몰래 만나기 위해 드나들던 비밀의 문을 이용, 성을 빠져나가기 위한 도피로로 채택했다. 탈출을 돕던 측근들은 마차의 규모도 줄이고, 싣고 갈 짐도 줄여 속도가 빠른 말을 쓸 것을 권했다. 하지만 천성이 왕비병환자로 호화 사치 생활을 누려온 앙투아네트는 목숨이 경각에 달린 와중에도 왕비의 품위에 맞는 탈출을 고집했다.

12마리의 말이 끄는 육중한 4륜 마차를 준비하도록 했다. 마차 내부는 식량, 포도주 저장소와 큰 화장실도 갖추도록 했다. 고급 화장품 등 짐도 가득 실었다. 탈출용 마차가 누구의 눈에도 쉽게 띌 수 있는 왕이 시찰 때 타고 다니던 화려한 마차 같았다. 덩치가 크고 짐이 무거운 마차는 빨리 달릴 수가 없었다. 루이 16세는 궁중 하인으로 변장했지만 얼마 못 가 두루에라는 역장에 의해 발각됐다. 농민들이 몰려와 왕과 왕비를 체포, 파리로 이송했다.

루이 16세가 처형된 2년 뒤 앙투아네트는 혁명재판을 받고 단두대에서 처형됐다. 죽음 앞에서는 왕비의 품위를 잃지 않기 위해 의연하고 당당한 태도를 지켰지만 자신의 언행에 대해 반성하거나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저는 지금 막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전혀 부끄럽지 않습니다. 당신의 오빠 루이16세와 마찬가지로 저는 죄가 없기 때문입니다” 앙트아네트가 죽기 몇 시간 전 자신의 시누이에게 쓴 편지다.

앙투아네트의 비극은 세월호 참사 당일 그 황망 중에 미용사를 청와대로 불러 올림머리를 손질한 박근혜 대통령을 생각케 한다. 그것이 여자의 마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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