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병일영남대법학전문대학원교수.jpg
▲ 배병일 영남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우리가 하루에 먹는 식사는 아침(조찬), 점심(오찬), 저녁(만찬)으로 3식이다. 지금은 당연히 3식이지만, 우리나라 역사상 우리가 3끼 식사를 한 것은 오래되지 않았다. 1960년대 초등학교(우리가 다닐 때는 국민학교라고 하였지만)를 다닐 때만 하더라도 아침을 먹지 않고 오거나 점심 도시락을 가져오지 못하는 등 식사를 거르는 친구들이 있었다. 조선 시대에는 대부분 아침저녁 하루 1끼 내지 2끼 식사를 하였고, 그래서 한번 먹을 때 제대로 많이 먹기 위해서 그런지 조선 시대 숟가락의 크기를 보면 지금의 주걱이나 국자만 하다. 조선 시대 2끼 식사는 서원에서 공부하던 학생의 급식장부로 추정되는 1617년의 사빈서재 식기안(泗濱書齋 食記案)이라는 고문서에서 하루에 2번 식사를 하였다고 기록 표시를 하는 것을 보더라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임금은 공식적으로 5식이나 6식을 하였고, 이로 인하여 당뇨병 등 성인병 질환으로 시달리다가 단명에 그친 경우가 많았다. 하루 3식은 조선 말기에 와서야 일반 서민들에게 유행하게 됐다고 한다. 이십여 년 전 정권의 요직에 있던 분이 로비 명목으로 점심과 저녁을 2-3번 하는 경우도 있을 만큼 바쁘다고 언론에 보도된 적이 있었고, 결국 불명예스럽게 관직을 그만두었던 기억이 있다. 요즘은 건강을 위해서 하루 3끼는커녕 오히려 식사를 하지 않는 단식요법이 유행인 것을 보면, 세상사는 참으로 요지경이라고 할 수 있다.

모친은 혼자서 스스로 혼밥을 자실 수밖에 없다. 자식과 동거를 하면 문제가 없지만, 세상 어느 자식이 부모를 모시지 않으려고 하겠는가마는, 세상살이는 그렇게 만만치 않으니 부득이한 일이다. 그래도 한 번씩 찾아뵐 때마다 나름대로 자식 노릇 한답시고 밥을 같이 먹으려고 하지만, 그때마다 이미 외부 손님과 식사모임을 하고 가니 먹을 수 없다. 그러나 자식이 밥을 먹고 왔다고 하면, 모친은 이미 밥을 먹었다고 한다. 기실 밥을 먹은 것이 아니라 미숫가루를 타 먹었든지 아니면 과자부스러기 또는 간단한 떡 한 조각으로 끼니를 때웠던 것이다. 자식이 먹지 않았다고 하면 같이 먹자고 하면서 밥을 차리니 부득이 한 끼를 더, 결국 하루 4끼를 먹을 수밖에 없다. 자식이 적게 먹으면 모친도 더 이상 먹지 않기 때문에, 부득이 꾸역꾸역 많이 먹을 수밖에 없다. 자식이 콜레스테롤이 높아서 고기는 안 먹는다고 선언했기에 고기반찬을 먹지 않는 것은 가능하지만, 밥은 다른 변명을 할 수가 없기에 어쩔 수 없이 먹어야 한다. 모친은 집에서 밥을 자실 때는 본인이 염두에 둔 식사량만 먹고, 그 양이라는 것도 밥공기의 반 정도에 지나지 않는 매우 적은 양이다. 그러나 그런 양만으로는 하루종일 바깥 청소 등 소일거리를 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라는 식사량이다. 그러다 보니, 항상 허기를 느끼게 되지만, 그렇다고 하여 혼밥을 먹기는 싫고, 그래서 항상 허기져서 걷기도 힘들어한다. 그런 사실을 모르는 자식은 모친이 나이가 들어서 그런 모양이라고 치부하고 만다. 그렇게 우리의 부모들은 서서히 건강이 무너져 내린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자식으로서는 모친과는 반드시 외식하려고 한다. 모친세대는 일제 강점기와 해방 이후의 굶주림을 겪으면서 밥에 대해 남다른 경외감이 있어서 밥그릇에 든 밥을 남기지 않는 것을 미덕이라고 생각하고, 이 생각은 먹던 밥을 남기면 죄악이라는 불문율로 굳어져 있다. 절에서 발우 공양을 받고서 밥 한 톨 남기지 않고 밥그릇을 물에 깨끗이 씻어 먹듯이, 모친 세대는 모두가 그렇게 하고 있다. 자식은 모친의 그런 점을 이용해서 외식하면서 밥을 항상 말아드린다. 예부터 식사를 할 때는 먼저 밥을 한술 떤 이후에야 밥을 국에 말아야 한다는 철칙이 있다고 믿는 모친 세대의 원칙을 어겨 가면서, 자식은 처음부터 국에 밥을 말아 드려서 밥을 모두 드시도록 하는 것이다. 특히 소머리 곰탕은 고기도 있고, 국물도 있으니 혼밥 회피용 식사로는 제격이다.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