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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언젠가 이 자리에서 도깨비 이야기를 한 번 해드린 적이 있습니다. 작년 10월경이었습니다. 당시의 난데없는 국정 교과서 소동을 두고 ‘백주 대낮에 웬 도깨비짓인가’라고 썼습니다. 그것보다 훨씬 더 큰 도깨비 소동이 일어난 지금, 그때 일을 되돌아보니 우리가 참 착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온갖 도깨비들이 횡행했던 그 몽매한 세월을 꾹 참고 잘 견디며 살아왔습니다. 만시지탄의 감이 없지는 않지만, 이제부터라도 주변을 잘 살펴서 그런 세월이 다시 오지 않도록 해야겠습니다. 쓰던 물건 중에서 용도(用途)가 다된 것들은 말끔하게 정리해야겠습니다. 깨끗이 태워 없애거나 깊게 묻어 다시 햇빛을 보지 못하도록 해야 됩니다. 사람 손때가 묻은 오래된 기물(器物)들은 주인의 방심(그들에게는 배신이 되겠죠?)을 틈타 언제든지 도깨비가 될 수 있습니다. 일단 도깨비가 되면 우리를 못살게 굽니다. 자나 깨나 방심은 절대 금물입니다.

지난번 도깨비 이야기에서는 딱딱한 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 이번에는 그 반대로 가겠습니다. 아침에 TV를 켜니 ‘도깨비’(공유·김고은 주연)라는 드라마를 보여줍니다. 남자는 도깨비, 여자는 도깨비 신부라는 중심 모티프를 중심으로 해서 이런저런 자유 모티프들이 얽혀 있는(산만하게?) 순정물인 것 같았습니다. 화면발이 좋고 주인공들이 좋아서 그냥 봤습니다. 그런데 주인공들의 대사 중에서 하나 재미있는 게 나왔습니다. 여자가 도깨비에 대해서 사전 조사를 해서 남자에게 들려주는 대목이었습니다. 마지막 부분에서 “도깨비는 가족을 만들지 않는다”라는 대목이 나왔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아주 먼 옛날 일 하나가 생각이 났습니다.

저희 집 아이가 초등학교 2~3학년 때 일입니다. 연구수업이 있었습니다. ‘말하기 듣기’ 시간이었는데 도깨비 이야기가 제재였습니다. 그림 다섯 장을 보고 그것을 이야기로 전환해서 발표해보는 수업 활동, 그리고 이어지는 이야기를 만들어서 발표해 보는 수업 활동이 있었습니다. 다섯 장의 그림에는 ‘나그네가 밤 산길을 가는데 도깨비가 나타나 씨름을 하자고 해서 씨름을 해서 나그네가 이겼고 씨름에 진 도깨비는 빗자루로 변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선생님이 아이들을 향해 그다음 이야기를 주문했습니다. 한 아이가 손을 들고 “나그네는 그 빗자루를 집으로 가져가서 잘게 잘라 까치집을 만들어 주었습니다”라고 발표했습니다. 보통은 이야기를 이을 때는 ‘인물, 사건, 배경’ 중의 한둘을 확장하는 방법이 사용됩니다. 그런데 그 아이는 완전히 새 이야기를 가져왔습니다. 선생님이 “그래?”하고 반문하고는 이내 다른 아이에게 발표를 시켰습니다. 한 아이가 “나그네가 다시 길을 가는데 도깨비 마누라가 나타나 또 씨름을 하자고 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선생님은 “그래요, 그럴 수도 있겠네요. 참 잘했어요”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정석대로 사건과 배경은 그대로 두고 인물을 확장했거든요. 그 장면을 보고 집으로 돌아온 저희 집 사람이 저에게 불만을 털어놓았습니다. ‘까치집’이 훨씬 더 창의적이지 않았느냐고요. ‘마누라’들은 세상에 널린 것인데 도깨비 이야기라면 뭔가 좀 색다른 게 나와야 되지 않겠느냐는 거였습니다. 저희 집 아이가 ‘까치집’ 이야기를 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제가 말했습니다. “원래 도깨비는 마누라가 없어요. 없는 마누라를 데려왔으니 그 애 이야기가 훨씬 더 창의적이네요.” 아이 이야기에서 까치집이 나온 것은 그 전날 저와 함께 저녁 뉴스를 보면서 잔인하게 전봇대 위의 까치집을 철거하는 장면을 봤던 때문이었을 거라고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 아이가 나중에 “도깨비처럼 능력을 가지면 제일 먼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이냐?”라는 인성 면접 질문에 “세월호를 구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네요. 저는 그 대답이 합격에 결정적으로 작용했다고 믿습니다. 그 옛날 도깨비가 도운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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