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세의 욕심을 버리니 하늘이 내린 풍광을 만나다

옥연정사는 류성룡이 후학 양성을 위해 10년에 걸쳐 완공했다.
안동시 풍천면에 있는 부용대는 높이 64m의 절벽이다. 태백산맥의 맨 끝 부분인 이곳에서는 낙동강의 지류인 화천을 사이에 두고 하회마을이 한눈에 들어온다. ‘부용’은 연꽃인데 벼랑 끝에서 내려다 보는 하회마을이 연꽃 같아서 그렇게 이름 붙였다. 말굽자석처럼 물굽이가 뚜렷하게 돌아가는 하회마을 전경 사진을 봤다면 부용대에서 촬영한 것으로 여기면 틀림이 없다.

부용대 일대는 겸암(謙唵) 류운룡(柳雲龍)과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형제의 족적이 뚜렷한 곳이다. 부용대 아래 산기슭에는 겸암정사와 화천서원,옥연정사가 자리잡고 있는데 겸암정사와 화천서원이 류운룡이 후학을 양성하거나 배향된 곳이고 옥연정사는 류성룡이 임진왜란 이후 징비록을 썼던 곳이다. 안동에 있는 운성형제의 건축물은 사이좋게 쌍을 이룬다. 종택은 양진당과 충효당으로 하회마을 안에 있는 정사로는 빈연정사와 원지정사가 짝을 이룬다. 부용대 아래에는 겸암정사와 옥연정사가, 그들이 배향된 서원은 화천서원과 병산서원이 짝을 이룬다.
류성룡이 63세에 심은 소나무.450년 동안 옥연정사를 지켜왔다.

옥연정사는 부용대에서 200여미터 숲길을 내려오면 있다. 화천서원을 지나 절벽 위 숲속에 자리잡고 있다. 선조 19년(1586년) 류성룡이 후학양성을 위해 지었다. 그의 나이 45세때다. 돈이 없어 집을 짓지 못하고 있을 때 탄홍스님이 10년동안 곡식과 포목을 시주해 완공했다. 본래 이름은 옥연서당이다. 류성룡은 ‘옥연서당기’에서 ‘강물이 흐르다 이곳에 다다르면 깊은 못이 되었다. 그런데 그 물빛이 깨끗하고 맑아서 마치 옥과 같기 때문에 옥연서당이라 한 것이다. 옥의 깨끗함과 못의 맑음은 모두 사대부가 귀하게 여겨야할 도리이다’ 라고 썼다. 현판에 눈부시게 맑은 청빈과 대쪽같이 푸른 기개를 담았으며 그 자신 깨끗하고 맑은 옥연이 되기를 소망했을 것이다.
부용대에서 본 하회마을.

건축물 중 세심재는 서당으로 쓰던 곳이다. 주역 ‘계사상전’의 ‘성인은 이로써 마음을 씻어 아무도 모르게 은밀한 곳에다 감추어 둔다(聖人以此洗心退藏於密)’는 말에서 따왔다. 세심재의 마루는 ‘감록헌’인데 왕희지의 시 중에서 ‘우러러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아래로는 푸른 물 구비 바라보네(仰眺碧天際 俯瞰綠水濱)’에서 차용했다. 감록헌을 사이에 두고 좌우에 방 한 칸씩을 두고 있다. 옥연정사의 남쪽 문은 ‘간죽문’인데 간죽문을 통해 바깥으로 나가보면 왕희지의 시어가 눈앞에 펼쳐진다. 문을 나서면 좁은 오솔길이 나오고 눈앞에 고운 백사장과 푸른 강물이 굽이굽이 흘러간다. 고개를 우러르면 푸른 하늘이요, 내려다 보면 푸른 물이 굽이 친다.

‘간죽문’은 ‘대나무를 보는 문’이다. 문을 나서면 왼쪽으로는 강물이, 오른쪽으로는 대나무 숲이 펼쳐지는데 사철 푸르고 휘어지지 않는 대나무의 절개를 담고 있다. 대나무는 사군자 중에서도 겨울을 상징한다. 삭탈관직 당하고 고향에 내려와 임금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가는 꼿꼿한 선비, 류성룡 자신을 말하는 지도 모르겠다. 그는 간죽문을 나와 부용대를 가운데 두고 반대편에 있는 형 류운용의 겸암정사를 아침 저녁으로 찾아갔다. 사람 하나 겨우 발을 내디딜 정도로 좁은 길이 500미터나 이어졌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 아래에 푸른 물결이 내려다보이는 무시무시한 길이다. 이 길을 후세 사람들은 ‘부용대 층길’이라 불렀다.
▲ 부용대층길.류성룡은 이 길을 따라 매일 아침 저녁으로 형이 있는 겸암정사를 찾아다녔다.




가랑비 봄 강물 위로 내리고
앞산은 어스름 저녁이 되네
마음으로 생각던 사람 나타나지 않고
매화는 스스로 피었다가 떨어지누나


- 류성룡의 시, ‘간죽문’



원락재(遠樂齋)는 류성룡이 ‘징비록’을 쓴 방이다. ‘논어’ ‘친구가 멀리서 찾아오니 즐겁지 아니한가(有朋自遠方來不亦樂乎)’에서 따온 이름이다. 벼슬에서 떨어져 나온 그는 이 방에서 징비록을 쓰면서 조정에서 인연을 맺었던 사람들과의 고회를 기대했을지 모르겠다. 마루는 ‘애오헌’이라 이름 지었다. ‘한여름에 초목이 자라니 / 집 둘레에 나무 우거졌네 / 뭇새들은 의탁할 곳 있음 기뻐하고 / 나 또한 내 초막 사랑한다오(후략). 도연명의 시 ‘독산해경’중 ‘나 또한 내 초막을 사랑한다오(吾亦愛吾廬)/ ’라는 구절에서 빌려왔다.

원락재 마당에서 단연 눈길을 끄는 것은 소나무다. 분재를 한 듯 탐스럽게 층층이 가지를 뻗고 굽은 소나무다. 450년이 된 이소나무는 류성룡이 63세 때 심은 수십그루 중 하나다. 세상을 떠나기 3년 전에 소나무를 심으면서 그는 ‘올해 내 나이 예순셋인데 새삼 나무를 심었으니 내가 생각해도 웃음이 저절로 나온다’고 했다. 그 때의 마음을 ‘소나무를 심고’라는 시로 남겼는데 정사 입구에 있는 비석에 새겨져 있다.

북쪽 산 아래 흙을 파서 서쪽 바위 모퉁이에 소나무 심었네
흙은 삼태기에 차지 않고 나무 크기 한 자가 되지 않네
흔들어 돌 틈에 옮겼으니 뿌리도 마디마디 상했으리라
땅은 높아 시원하여도 가꾸기엔 물이 적을듯한데
비 이슬 젖기엔 더디면서 서릿바람 맞기엔 빠르겠구나
늙은이 일 좋아 억지 부려 보는 이 속으로 어리석다 웃을 테지
어찌하여 늙은이 나이 들어 자라기 힘든 솔을 심었을까
나 비록 그늘 보지 못해도 뉘라서 흙 옮겨 심은 뜻은 알겠지
천 년 지나 하늘 높이 솟으면 봉황의 보금자리가 되리라

▲ 간죽문에서 본 옥연정사 전경

다시 시계를 거꾸로 돌려보자. 그는 옥연정사를 완공한 지 2년 만에 선조의 부름을 외면할 수 없어 조정에 출사한다. 그리고 4년이 되던 해 임진년(1592년)에 전대미문의 임진왜란이 터지자 영의정 겸 4도체찰사를 맡아 전쟁을 승리로 이끈다. 권율과 이순신은 발탁하고 명나라 군대와의 이해관계를 조정하며 명재상으로 역사속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1597년에 다시 정유재란이 발발하면서 그는 북인들의 탄핵을 받고 삭탈관직돼 옥연정사로 돌아온다. 선조는 특유의 우유부단한 처세로 류성룡에게 깊은 상처를 준다.
옥연정사는 옥같은 깨끗하고 못같이 맑은 도리로 살겠다는 포부를 담았다.

옥연정사로 돌아온 그는 정치와는 완전히 결별했다. 선조의 수차례에 걸친 부름을 거절하고 원락재에 들어앉아 ‘징비록’을 쓴다. ‘징비’는 ‘내 지난 잘못을 반성하여 후환이 없도록 삼가네(予其懲而毖後患)’이라는 《시경》의 구절에서 가져왔다. 임진왜란의 원인과 과정, 결과를 낱낱이 기록했다. 그는 선조가 내리는 공신록도 거절하고 나라를 멸망직전까지 몰고 백성을 도탄에 빠지게 한 정치에 대한 통렬한 반성문을 썼고 심지어 임금에게 까지 우회적으로 책임을 물었다. 그는 이 책 초고본에서 한양을 버리고 북쪽으로 도망치는 선조 임금을 향해 소리치는 농부의 이야기를 기록했다. ‘나랏님이 우리를 버리고 가시니, 우리들은 어떻게 살라는
김동완 칼럼리스트.jpg
▲ 글·사진 김동완 자유기고가
것입니까’ 척 보면 삼천리다. 농부는 류성룡 자신이다. 농부의 입을 빌어 비겁한 임금에게 치명타를 입힌다.

징비록을 탈고한 류성룡은 끊임없이 찾아오는 사람들 때문에 지쳐갔다. 서미마을로 거처를 옮겼다. 서미마을 중대바위 아래 초가삼간을 짓고 ‘농환재(弄丸齋)’라 이름 붙였다. 이 마을은 본래 이화동이었는데 류성룡은 ‘안동부의 서쪽 아름다운 마을’ 이라는 뜻으로 ‘서미동(西美洞)’으로 고쳐 불렀다. 그는 서미동으로 옮긴지 3년도 채 안돼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66세였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 유언을 남겼다. ‘숲속 새 한 마리 쉼없이 우는데 / 문밖에는 나무 베는 소리 정정하구나/ 기운이 모였다 흩어지는 것이 우연인데도/ 평생 부끄러운 일 많은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김동완 자유기고가
서선미 기자 meeyane@kyongbu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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