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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태의 고전시담]정도전(鄭道傳) 방김거사야거(訪金居士野居)

김진태 전 검찰총장 등록일 2016년12월18일 16시0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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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태 전 검찰총장
秋陰漠漠四山空 (추운막막사산공·가을 그늘 침침하고 사방 산은 비었는데)
落葉無聲滿地紅 (낙엽무성만지홍·지는 잎은 소리 없이 땅에 가득 붉구나)
立馬溪橋問歸路 (입마계교문귀로·시내 위 다리에 말 세우고 갈 길을 묻노라니)
不知身在畵圖中 (부지신재화도중·이 몸이 그림 속에 있는 줄을 모르네)

이 시는 시골에 은거하고 있는 김 거사를 찾아가는 도중의 가을 경치를 읊은 것이다. 단풍 든 나뭇잎들이 떨어져 땅바닥에 나뒹구는 가운데 짧은 해마저 이미 기울어 금시 사방이 어둑어둑하다. 문득 자신이 어디 있는지 살피니 그림 속에 있구나. 생명 현상이 다 사라진 그림 속에 있는 그를 통해 하늘이 순간적으로나마 그의 천명을 보여 주었는데……. 온통 새로운 나라 건설에 흥분해 있던 그였으니 어찌 이를 눈치챌 수 있었겠는가.
제행(諸行)이 무상(無常)하거늘 그것이 자연 현상이든, 새로운 나라 건설이든 다를 바가 있겠는가.



삼봉(三峯) 정도전은 고려에서 조선으로의 교체기에 뛰어난 정치력으로 새 왕조를 설계한 인물이다. 그러나 정작 자신이 꿈꾸던 이상 세계는 실현하지도 못하고 오히려 정적의 칼에 단죄돼, 조선 왕조 말기 대원군이 경복궁을 복원할 때 경복궁 설계의 공을 인정받아 겨우 신원되는, 극에서 극으로 달리는 삶을 살았다.

정도전은 이성계가 자신의 꿈을 실현해 줄 수 있는 인물임을 확신하고 이때 그는 蒼茫歲月一株松 (아득한 세월에 한 그루 소나무) 生長靑山幾萬重 (푸른 산 몇만 겹 속에 자랐구나) 好在他年相見否 (잘 있다가 다른 해에 서로 볼 수 있을까) 人間俯仰便陳跡 (인간을 굽어보며 묵은 자취를 남겼구나)라는 시를 써서 남겼다. 그를 추대한 후 새 왕조를 이끌 물적, 인적 인프라를 완성하는 데 온 힘을 쏟았다.

‘한 고조가 장자방을 이용한 게 아니라 장자방이 한 고조를 이용한 것이다’라고 말하며 거대한 야망의 실현에 나선 그가 조선 건국에 공이 크고 보다 더 적통이 있어 보이는 신의왕후 소생을 무시하고 신덕왕후의 어린아들을 세자로 책봉하게 한 저의는 무엇이었을까. 이 선택은 그들은 물론 그의 목숨까지 빼앗아 가게 만들었는데,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통한 왕도정치의 이상론과 강력한 왕권에 기초한 왕조 국가의 현실론 사이의 다툼이라는 설명만으로는 무언가 허전한 감을 지우기 어렵다. 현실이 없는 이상은 존재할 수 없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그, 장자방이라고 자처한 그가 아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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