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0년 선비정신 지켜온 종가

병곡종택
△안동 선비정신 대표하는 ‘가일 마을’

가일마을은 고려를 개국할 당시 공을 세운 안동 권태사의 후예들 가운데 복야공파 권항이 입향한 이래 지금까지 600여 년 동안 삶의 자취가 담겨진 안동 권씨 집성마을이다.

하회마을에서 직선거리로 4~5km, 마을 뒤편에는 검무산이 우뚝 서 있고 경북도청 신청사도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다.
가일마을

이 마을 사람들은 의를 위해서는 누구에게도 굽히지 않고 절의가 있어야 한다고 믿고 있다. “유가(儒家)에는 3년마다 금부도사가 드나들어야 하고, 갯밭에는 3년마다 강물이 드나들어야 한다”는 말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명분을 위해서는 금부도사의 체포영장도 두려워하지 않는 꿋꿋한 선비정신을 엿볼 수 있다.
가일마을 입구

조선시대 금부도사가 세 번이나 다녀간 가일마을은 일제 강점기에는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곳이다. 근대에 와서는 사회주의 운동의 시초를 연 권오설과 권오직 형제를 비롯해, 권준희, 권오상 권오운, 권오창 등 안동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를 배출하면서 가일 마을은 ‘안동의 모스크바’라는 별칭을 갖게 됐다.

가일마을은 역사의 격변기마다 수많은 고초를 겪으면서도, 한 번도 충의와 절개를 꺽지 않은 그야말로 절의 정신을 보여준 마을이다.
가일마을



△거듭된 사화에도 가문 지켜낸 안동 권씨

지금의 안동 권씨가 가일 마을에 터를 잡게 된 것은 세종 때 정랑(正郞)을 지낸 권항(1403~1461)이다. 하회마을 류개의 손자인 류서의 사위가 되면서 부터다. 류개는 하회마을 입향조인 류종혜의 숙부이다.

이후 권항의 손자인 화산 권주(1457~1505)가 18세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24세에 문과 급제를 하는 등 가통을 이어 가일 마을의 안동 권씨 문호를 열었다. 그러나 권주는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유배생활을 하다 숨을 거두었고 큰아들 권질(1483~1545)은 귀양을 갔으며, 차남 권전(1486~1521)은 기묘사화 때 화를 입었다. 권질은 딸만 여럿 있었는데, 이 중 딸 한 명이 퇴계 이황의 둘째 부인이 됐다.

권주의 넷째 아들인 권굉(1494~?)이 가계를 계승했고 권굉 역시 차남인 권의남, 그의 아들인 권호연의 손자인 권경행으로 가계를 이어왔다. 권경행 대에 와서는 외가인 예천 용궁면 오룡리로 이주해 살다가 손자인 권징(1636~1698) 에 이르러 다시 가일 마을로 돌아왔다.

권징의 아들인 병곡 권구(1672~1749)는 갈암 이현일(1627~1704)의 제자로 당시 안동의 대표적인 학자로 명성을 떨쳤다. 가일 안동 권씨 가문의 위상을 드높인 이가 권구였다. 1728년 ‘이인좌의 난’으로 고초를 겪은 이후에는 은거하며 후학 양성에만 몰두했다. 사후에 사헌부지평에 증직되었고 이조판서에 추증됐다.

가일 안동 권씨는 여러 번의 사화와 난에 휘말리는 고난이 있었음에도 후손들은 올곧은 절의로 굳건하게 가문을 지켜냈다. 뿐만 아니라 풍산 류씨, 순천 김씨, 안동 김씨, 진성 이씨, 재령 이씨 등 안동 인근 뿐만 아니라 지역의 명문가문과 혼인관계를 맺으며 명문가로서 자리매김했다.

가일마을에 고택은 열네 채나 된다. 이중 여섯 채가 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병곡종택

마을의 중심부에 있는 병곡종택은 이 마을의 상징적 건물이다. 병곡 권구가 태어나고 후학을 가르치던 곳이다. 1739년 마을 젊은이들이 병곡에게 배우기 위한 처소로 삼고자 집을 지었는데, 병곡은 그 이름을 시습제(時習齋)라 했다. 입구에는 큰 회화나무가 서 있어 집안에 학문이 높은 분이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시습제

현재 입향조 권항의 19세손 권종만 내외가 살고 있다. 그는 직장과 교육문제로 마산에 살다가 2005년 고향으로 돌아왔다. 문중에서 매월 정월에 종친회를 여는데 그가 돌아온다는 소식에 열흘 늦게나 종친회를 열어 환영식을 열어줘 종손은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고 한다.

병곡종택 사당


△안동의 모스크바 가일 마을과 권오설
가일마을 입구 권오설 기념비

근대에 와서는 사회주의 운동의 시초를 연 권오설과 권오직 형제를 비롯하여, 권준희, 권오상 권오운, 권오창 등 안동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를 배출하면서 가일 마을은 ‘안동의 모스크바’라는 별칭을 갖게 된다.

당시 지방에선 소작료를 7할까지 요구하는 일본인들의 횡포가 심했다. 이에 권오설은 ‘풍산소작인회’를 만든다. 풍산소작인회는 소작농뿐 아니라 중·소지주와 지식층이 대거 참여한 5천여 명 규모의 전국 농민조직으로 성장한다.

이후 권오설은 조선공산당에 가입,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에 오른다. 그는 3·1운동을 계승, 발전시켜 1929년 광주학생운동으로 완결된 국내 3대 독립운동 중 하나로 평가되는 6·10만세운동을 주도한다. 하지만 이 사건이 일제에 발각돼 검거된다. 권오설은 결국 복역 도중 1930년 4월17일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그의 나이 34세 때였다.

그의 시신이 안동역에 도착했을 때 안동 인근의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는데 안동역에서 가일 마을까지 침묵의 운구행렬이 긴 띠를 이뤘다고 한다. 일제는 그의 시신이 든 관을 열어보지 못하도록 함석철판으로 밀봉한 채 가족들에게 건네주었으며, 봉분을 만들지 말라고 강요했다.

행여 그의 무덤이 독립운동가들의 성지가 될까 경계한 까닭이다. 결국 권오설은 봉분과 비석이 없는 평장으로 고향 마을 공동묘지에 묻혔다. 그 후 2008년 무덤이장 시 발견된 권오설의 관은 납땜으로 밀봉한 철제관으로 발견됐고 현재 안동독립운동기념관에 그 철제관이 전시돼 있다.
권오설 기념비 앞으로 풍산들이 펼쳐져 있다.

그동안 사회주의 계열 운동으로 말미암아 권오설은 2001년에야 권오설 선생 기념비 건립추진위원회가 조직됐고 같은 해 11월 11일 가일 마을 입구에 권오설 기념비가 세워졌다. 2005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권오설 생가 터
오종명 기자
오종명 기자 ojm2171@kyongbuk.com

안동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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