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조 정조 때 조정철은 26세에 대역 죄인으로 몰려 죽게 됐다. 24세에 과거에 급제, 벼슬길에 올라 출세 가도를 달리던 조정철에겐 날벼락이었다. 정조가 즉위한 지 몇 달도 안 된 시점에 강용휘란 자가 “조정철이 임금을 시해하려는 모의에 가담했다”며 고발했던 것이다. “이제 죽었구나” 모든 것을 단념하고 있던 조정철에게 조상의 음덕이 작용했다. 조정의 신하들이 55년 전에 사약을 받고 죽은 그의 증조할아버지 조태채 대감을 거론하며 조정철을 살려줄 것을 정조에게 간했다.

경종을 옹호하여 집권당이 된 소론은 세자 영양군(뒷날 영조)을 뒷받침 한 노론들을 역모로 몰아 숙청을 단행했다. 이 때 노론의 실세였던 김창집, 이어명, 이건동과 함께 4대신의 한사람이었던 조태채도 진도로 유배돼 그곳에서 사사됐던 것이다. 영조의 뒤를 이은 정조는 억울하게 처형된 노 대신의 후손인 조정철을 죽일 수 없었다. 참형을 면하게 해준 뒤 제주도로 유배 보냈다. 조상의 음덕으로 조정철은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났다. 조정철은 59세에 귀양에서 풀려날 때까지 33년이란 긴 세월의 유배생활을 겪었다.

하지만 조정철이 귀양에서 풀려나자 말자 출세 가도가 활짝 열렸다. ‘고통 없이는 열매가 없다(No pain No gain)’는 격언은 조정철을 두고 하는 말이 됐다. 충청관찰사, 병조판서, 좌참판을 거치고 80세에 중추부사에 올라 행복한 여생을 마감했다. 조상 덕에 부귀영화의 말년을 향유하면서 장수의 복까지 누렸다. 20대 중반에 맞았던 일생일대의 위기가 한 세대 후 인생 대박으로 보상 받은 셈이 됐다. 조상의 음덕이 조정철의 수호신이 된 것은 그의 올곧은 성품과 생사를 넘나드는 온갖 시련과 고통을 참고 또 참고 기다리고, 또 기다린 강인한 의지가 밑거름이 된 것이다.

새누리당의 당권을 싸고 비박과 난타전을 벌이고 있는 친박들의 입에서 독설이 난무하고 있다. 이정현 대표는 “김무성, 유승민 두 분은 탯줄을 잘 묻어서 좋은 곳에 태어나 4선한다”며 조상 덕을 거론, 두 사람을 폄하했다. 조상의 음덕도 후손이 변변치 못하면 ‘그림의 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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