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좌도에서 왜적을 몰아낸 영천의병의 공로
영천성의 쾌승을 증언하는 조양각과 창대서원
의병들은 대장 권응수. 전봉장(선봉장) 홍천뢰, 좌총 신해, 우총 최문병, 중총 정대임, 별장 김윤국, 찬획종사(작전참모) 정세아, 정담 등으로 지도부를 구성했다. 군대의 이름은 창의의용군(倡義義勇軍)이라 정했다. 25일에도 경주의 권사악, 손시, 최진립 등이 정예병 100여 명을 이끌고 당도했다.
다음날인 7월 25일부터, 창의의용군은 전투 준비에 본격적으로 돌입했다. 먼저 선봉대 400명을 선발하여 남천을 지키게 했다. 일본군들이 먹을 물을 구하지 못하게 하려는 작전이었다. 26일에는 영천 의병장 정세아와 정대임의 의견에 따라 군대를 역할별로 편성했다. 강쪽 절벽 위에 자리잡고 있는 남문 일원은 지리를 잘 아는 영천 의병들이 맡고, 상대적으로 평탄한 서북쪽은 타 지역 군사들이 공격하기로 했다.
성의 남문과 동쪽 방향에는 중총 정대임, 우총 최문병, 찬획종사 정세아, 찬획종사 정담, 영천군수 김윤국, 의병장 조희익, 신준룡, 이번, 조덕기 등이 지휘했다. 이때 정천리는 특수 임무 수행을 위해 지대가 높은 마현산에 주둔했다.
서북편에는 대장 권응수, 경주판관 박의장, 좌총 신해, 선봉장 홍천뢰, 신녕현감 한주, 하양현감 조윤신 등이 포진했다. 이때 영천에서 가장 많은 의병군을 이끌고 있던 정세아는 자신의 군대를 권응수가 지휘하는 서북쪽 공격진에 넘겨주었다.
하지만 수백 명의 아군 선봉대는 용감히 돌진했고, 잠시 적의 총포에 주춤하기도 했지만, 정대임이 앞장서서 전투를 독려하자 이내 전세가 갈라졌다. 적들은 다시 성안으로 후퇴했고, 아군은 성문을 부수고 짓이겨 쳐들어갔다. 마침내 정대임이 적의 대장 법화(法化)의 목을 베었다.
서북문에서도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처음에는 적군 1천여 명이 성 밖으로 뛰쳐나와 팽팽한 접전이 이어졌지만 권응수가 직접 병사들을 이끌고 수십 명을 참수하자 아군의 사기가 하늘로 치솟았다. 이윽고 아군은 성문을 뚫고 성안으로 들어갔다.
다음날 확인해보니 아군 전사자는 80여 명, 부상자는 230여 명이었다. 적들 중 경주로 도주한 자는 불과 수십 명에 지나지 않았다. 안동과 경주를 잇는 보급로인 영천성을 빼앗긴 적들은 모두 상주와 경주로 물러갔다. 경상좌도의 상당 부분이 위험으로부터 벗어나 안전 지대가 되었다.
류성룡도 <징비록>에 ‘영천성을 수복함으로써 (중략) 일본군이 경주로 도망갔고, 이로부터 신녕, 의흥, 의성, 안동 등지의 일본군이 모두 한 곳에 모여 있게 되어 경상좌도의 군읍이 안전해졌다. 이는 모두 영천 싸움의 공로’라고 기록했다.
영천성은 다 허물어지고 없다. 그러나 당시 남문 일원에 있었던 조양각의 위용은 오늘도 당당하고, 그 아래를 흐르는 남천 또한 세월의 무게를 잊었는지 오로지 평화롭기만 하다.
물론 우리가 지금 보는 조양각도 1368년(고려 공민왕 17) 정몽주가 당시 영천부사 이용 및 지역 선비들과 힘을 합쳐 건설했던 바로 그 정자는 아니다. 고려 말기 건물 조양각은 1592년 7월 27일 영천성 수복 전투 당시 불에 타서 사라졌다. 현재 건물은 인조 때(1623~1649) 다시 지어진 것이다.
창대서원은 임진왜란 의병장 창대(昌臺) 정대임을 모시기 위해 1697년 처음 지어졌다. 그러나 1868년(고종 5) 서원철폐령을 당해 훼철되었고, 1955년 녹전동 창대마을에서 지금 위치로 이건하였다. 그 뒤 2004년 화재로 소실된 것을 재차 복원하였다. 창대서원에는 현재 강당, 사당 충현사, 재실 유의재, ‘의병대장 증 가선대부 호조참판 창대 선생 신도비’가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