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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인물] 17.예천군 지보면

조선시대 전국서 가장 많은 과거 급제자 배출한 명당

이상만 기자 smlee@kyongbuk.com 등록일 2016년12월20일 17시2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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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군 지보면은 토양이 비옥해 농사가 잘되고 낙동강이 굽이쳐 흐르는 곳으로 인재가 많이 배출된 명당 중의 명당이다.

이 고장 사람들은 예천에서도 기가 강하다. 선현 때부터 내려온 그 강한 기로 학자와 관인, 선비, 우국지사 등 유명인물들이 많이 배출됐다. 조선 초 14명의 문과 급제자를 배출하는 등 예천지역이 조선 시대 인구 비례해 전국에서 가장 많은 과거 급제자가 나온 곳임을 증명하고 있다. 예로부터 여러 성씨가 모여 살던 곳으로 늘 문중에서 논쟁과 시비가 일어 선현들의 현명한 지혜를 보여주는 말(言) 무덤이 있는 곳이다. 말 무덤은 지금도 정치인들과 기업인 더 나아가 사회 활동에서 말을 조심해서 하라는 교훈을 주는 교육의 장이다.

지보면은 예천 특산물의 대표인 예천 참기름의 원조이고 지금도 그 명성은 전국으로 드높다.
특히 지보면 도장리는 조선 8대 명당으로 알려졌다. 동래정씨 중시조인 정사 선생의 묘가 있는 곳이다. 예천군 지보면은 멀리 학가산을 바라보며 남으로는 비봉산 사이에 낙동강과 내성천이 흘러 넓은 들판과 큼직한 촌락을 형성된 곳이다. 

지보면은 총면적 7천822ha로서 예천군 12개 읍면 중 면적이 가장 큰 곳으로, 1965년 1만7천278명이 살았던 곳이었지만, 지금은 인구가 점차 줄어 현재 3천118명이 살고 있다. 
한 말 지보면은 용궁군 내상, 내하, 신상 3개의 면이 지보면이 됐고, 1914년 예천군에 이 속되면서 현재 24개 리, 66개 자연마을로 이뤄졌다. 

▲지보면 출신 인물

지보면 대죽리는 퇴계 이황의 외가마을이 있어 퇴계 선생과 연관된 곳으로 유명하다. 지보면의 대표 명신으로는 정사, 정사용이 있다. 

정사 (鄭賜; 1400~1453)는.지절과 덕행 학문이 뛰어나 사림에 의해 추묘돼 선조 원년에 완담 사에 배향된 인물이다. 그는 명당 정묘(鄭墓)의 전설을 남겼고, 자손 문익공 광필이 영의정이 되어 동래 부원군에 봉해진 인물이다. 

정사용(鄭士龍:1491~1570) 호는 호음(湖陰)이다. 명나라 조정에 조선문장 정사용이라고 격찬을 받은 분이다. 직제학 사의 증손으로 1509년에 문과에 급제해 1534년 동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1554년 대제학이 됐으며, 총 3차례의 대제학을 역임했고 시문 음률 글씨에 모두 뛰어났다고 한다. 호음 집, 호음잡고, 조천일록이 있으며, 서울대학교 박물관에 글씨가 남아 있다고 전한다.

정영방(鄭榮邦:1577~1650)은 1605년 진사시에 합격했다. 하지만 세상이 어지러워 학문탐구를 위해 영양 임천으로 옮겨 살면서 학문에만 매진했다. 임천으로 이주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정자인 서석 지에 옮겨 산 것이 유명하며, 그의 방에는 도서가 가득하여 보는 사람마다 지상 신선이라 그를 칭했다. 

권산해(權山海:1403~1456)는 지보면 대죽리에서 태어났으며, 호는 죽림(竹林)이다. 1454년 종박사(宗薄寺) 검정(檢正)을 제수했으며,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가 육신과 더불어 동시에 순절했고, 자손이 100년간 과거보거나 벼슬을 할 수 없는 금고 백 년이라는 형벌에 처했다. 1789년 복권돼 이조참판 및 정려가 내려졌다. 고종 때에는 이조판서와 충민이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며, 노봉서원에 배향됐다. 

정기원(鄭期遠:1559~1597)은 24세에 국자 시에 합격해 진사가 되고, 27세에 문과에 급제해 승정원 주서가 됐다. 왕이 하루는 야간에 모든 학사에게 술을 내려 마음껏 마시게 한 뒤, 귀가하는 모습을 엿보았는데 정기원만 흐트러짐이 없어 특별히 육품관에 제수해 사헌부감찰을 명했다.


지보면 대죽리의 말무덤 

지보면 대죽리의 말무덤

예천군 독립유공자로 포상된 95명 중 10명이 지보면 출신이다. 고영찬(1928~미상), 김수준(1879~1913), 김영상(1879~1913), 윤우식(1909~1934), 윤창하(1884~1964), 전병림(1924~1990), 전병표(1876~1961), 장휘세(1906~1931), 조용구(1861~1925), 조용필(1867~1946) 등 10명이 포상됐으며, 그만큼 지보면 구국 활동의 세력이 대단하였음을 알 수 있다. 

국문학의 태두 조윤제 박사(1904~1976)는 민족 해방과 통일을 위해 헌신한 실천적 지식인이다. 

특히 1948년 김구, 조소앙의 남북협상에 동행하고 4·19혁명 때 대학교수단 시위를 주도하고 그 이후 고조된 통일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1965년 한일 협정 비준 때 대일 굴욕외교 반대투쟁에 가담했다. 이같이 우리나라 국문학연구의 개척자이자, 오로지 민족과 통일을 위한 학문에 전념했던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1937년 ‘조선 시가 사 강’을 저술해 국문학 역사상 개척 적인 업적을 세웠고, 1949년 ‘한국 문학사’, ‘한국 시가의 연구’, ‘국문학개설’ 등 사대 저서를 남겼으며, 서울대, 성균관대, 영남대학 교수 및 대학원장을 역임하면서 학계 활동에서도 지대한 공헌을 했다. 

정·재·법조계는 현석호 제9대·11대 국방부 장관, 조재봉 국회의원 제8대 국회의원, 전광우 (전) 금융위원회 위원장, 정용인 영진 법무 법인 대표 변호사, 현석주 전 육군 1군 부사령관, 유학성 제12~14대 국회의원, 현정택 전 대통령비서실 정책조정수석, 조현천 국군 기무사령관(중장)이 있고 김태한 전 계명대 총장은 주요 저서로 영어학개론, 언어학 관계 저서, 공저 및 번역 12권, 논문 20여 권 등이 있다.

,이진규 전 청와대 비서관, 최상호 삼백레미콘아스콘(주)주주&부사장,윤용식 (전)중앙교육연수원장,최동순 법무법인세무사, 김한규 삼성 에버랜드 상무, 지오그린텍 대표 권재익, (주) 한국 카드키 대표 김병근, 윤상수 대구국세청장, 조현호 (전)경찰청장,박홍섭 마포구청장, 이명숙 전 여성 변호사협회장·법무법인 나우리 대표 변호사, 최동순 세무사, 국악인 최수인, 윤한 세무회계 대표 윤황수, 예천에는 정영광 전 예천군의회 의장, 최병욱 예천군의회 현 부의장 등이 있다.

기업인으로는 김운한 한화그룹 상무, 김태한 삼성바이오로직스 대표이사, 최혁영 (주)미혜 산업 삼우 개발 제일토건 대표 , 최광열 성광 물류 대표, 박금섭 동부엔지니어링 부사장, 이소환 남 평화시장 흥인 개발(주) 대표, 남병원 미광산업 (주)대표, 전재영(주)송강 그린 에너지 금정토건 영진 투자컨설팅 대표, 이재식 대원전업사 대표(수원시 의원), 김문환 협심기업(주) 대표, 권재익 지오그린텍 대표, 김명일 경안 전선(주), 이재웅 한솔 원룸텔 대표, 김종수 대영기계공업 대표, 이창호,(전) 재구예천군민회장 (주)대천대표 조용래, 윤상일 창성어패럴 대표, E.M.T 대표, 전규동 세화 파이프 대표, 윤상배 신풍 섬유 대표, 윤세청 (주)신일 PMC 상무이사, 윤덕수 두리원웨딩홀 대표, 장병덕 (주)제이드교역 대표, 양경호 (주)아트쎄니타리 대표, 윤희육 (주)모닝스타코리아 대표, 남용섭 ㈜대성 스틸 대표, 김동열 금강 산업 제일서적 대표, 임영상 유길 산업(주) 대표, 박종인 경인 정밀㈜ 대표, 장하웅,(주)신 동양 페이퍼 대표, 굵직한 계열사만 7개를 운영하는 MJ 그룹 회장 김정환 등이 있다.

지보면에는 일제 강점기 항일운동 단체인 무명당 지도자인 윤우식(尹雨植:1906∼1934) 생가와 1609년 (광해군 1)석문 정영방이 건축한 건물인 석문 종택이 있다.

대죽리의 말 (言) 무덤은 마을 사람 모두에게 사발을 하나씩 가져오게 한 뒤 주둥개산에 큰 구덩이를 파놓고는 "서로에 대한 미움과 원망과 비방과 욕을 모두 각자의 사발에 뱉어놓으라"고 했다. 싸움의 발단이 된 말(言)들을 사발에 담아 깊이 묻은 말 무덤을 만든 것이다. 이런 처방이 있는 뒤부터 싸움이 없어지고 두터운 정이 계속되고 있다고 한다. 50년 전까지만 해도 주민들은 말 무덤 앞에서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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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보면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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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만 기자

    • 이상만 기자
  • 경북도청, 경북지방경찰청, 안동, 예천 담당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