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석천에서 바라본 재천정과 석계서원
회야(回夜)강은 논배미를 돌아서 흐르는 강, ‘돌배미강’이다. 한글 고유지명을 한자지명으로 바꾸는 과정에서 ‘돈다’는 ‘회’로, ‘배미’는 ‘밤(夜)’으로 무리수를 두면서 이름이 그렇게 됐다. 신라시조 박혁거세가 태어난 ‘박’이 밤에 이 강을 떠돌았다고 해서 그렇게 됐다는 설이 있다. 

강은 여러 마을을 거치면서 저마다 이름을 달리 불리었는데 웅촌에서는 마을 남쪽을 흐르는 강이라고 남천, 온산에서는 회야강, 서생에서는 일승강이라고 불렸다. 일승강이라는 이름에는 임진왜란 때 단 한번의 전투로 왜군들을 이겼다는 자부심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다. 강은 경상남도 양산시 원효산 원효샘 계곡에서 시작해 울산 광역시 울주군 웅촌면과 청량면을 거쳐 온산읍과 서생면을 가르면서 울산항을 거쳐 동해도 흘러든다. 또 한 줄기는 천성산과 대운산에서 흐르는 물이 몸을 섞어 웅촌면 검단분지로 흐르다가 석천리에서 물굽이를 동쪽으로 돌려 청량면을 지나 동해로 나간다. 

재천정에서 바라보는 석천과 병풍바위
재천정(在川亭)은 물굽이가 동쪽으로 몸을 비트는 지점, 울주군 웅촌면 석천리에 있다. 재천정은 죽오(竹塢) 이근오(李覲吾·1760~1834)가 지은 정자다. 이근오는 울산 출신으로 문과에 급제한 몇 안되는 인물 중 한사람이다. 남용만의 문하에서 수학한 뒤 승정원 부정자, 봉상시 참봉, 성균관 전적을 역임한 뒤 병조좌랑과 사헌부 지평을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고향집, 울주군 웅촌면 석천리에 석천정을 짓고 후학양성에 힘을 쏟았다. ‘울산부읍지’는 “석천정은 울산부의 서쪽 석천리에 위치하는데 죽오 이근오가 지었다. 맑고 깊은 물이 돌아가는 앞쪽으로 바위가 병품처럼 펼쳐져 있고 깊고 그윽한 경치는 속세를 떠난 듯하여 독서와 강학 하기에 적당하다”라고 쓰고 있다. 읍지는 그렇게 쓰고 이병운의 시를 소개하고 있다. 

“뒤늦게 벼슬을 버리고 거친 언덕에 머물 계획세우니/ 세월 저무는 차가운 산에 해는 이미 기우네/ 분에 넘친 공명은 헌신짝같이 가벼우니/ 가슴 속 기이한 기운 푸른 안개처럼 왕성하네 (하략)”

재천정 뒷면
재천정은 본래 석천정이었는데 나중에 이름을 바꾸었다. 응와 이원조가 쓴 ‘재천정기’에 그렇게 나와 있다. “돌아가신 지헌 죽오 학성 이공은 (중략) 벼슬을 버리고 내려와 노년을 보낼 계획으로 석천 위에 정자를 지었다(중략) 정자의 동쪽 방은 여사헌(如斯軒), 서쪽 방은 종오료(從吾寮)라 하였고 (중략) 이로써 만년에 석천에서 재천으로 고쳤다”‘재천’은 논어 ‘자한’ “공자가 냇가에 계실 때 말씀하셨다. 흘러가는 것이 이와 같구나. 밤낮으로 쉬지 않고 흐르는구나(子在川上曰 逝者如斯夫 不舍晝夜)에서 ‘냇가에 계실 때’를 따왔다. 동쪽 방 ‘여사헌’은 ‘ 흘러가는 것이 이와 같구나’에서 차용했다. 서쪽방 ‘종오료’의 ‘종오’는 논어 ‘술이’ 편 “부가 추구할 만한 것이라면 채찍을 잡고 일을 하는 천한 사람이라도 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내가 좋아하는 바를 따르겠다.(富而可求也 雖執鞭之士 吾亦爲之 如不可求 從吾所好)”는 구절의 ‘종오소호’를 빌려왔다. 이근오는 정자와 방에 논어 구절을 빌려 현판을 쓰고 자신의 귀거래사를 담았다. 현판이름 가지고 짜 맞추어보니 이런 뜻이 담겨 있다. ‘공자가 냇가에 계실 때(在川) 말씀하셨다. 흘러가는 것이 이와 같구나(如斯). 시간의 흐름이 이와같이 빠르니 나는 내가 좋아하는 바를 따라(종오) 살리라’


푸른 산의 언덕에 작은 정자 서 있고
흐르는 시냇물에 나무 그림자 비켜섰네
뜬 세상 공명에 벼슬도 부끄러워
늘그막 고질병에 노을 아래 누웠네
시골 마을에는 여느 사람들 살아가고
봄날 한가로이 뽕잎따는 이웃들
아침 저녁으로 세겹바위 마주하며
내 좋을 대로 속세 미련 멀리하리

- 이근오의 시 ‘석천정’

재천정의 초기 이름은 석천정이다. 마을이름 석천리, 돌내마을도 여기서 유래한다 개울에 돌이 많아서 그렇게 불렀다. 석천을 테마로 하고 석천 앞의 깎아지른 듯한 절벽, 병풍바위를 배경으로 한다. 정자 앞에는 냇물이 흐르고 냇물 반대편에는 푸르런 산이 병풍처럼 막아서고 있다. 냇물 속에는 기이한 형태의 돌이 삐죽삐죽 솟아나고 있다. 응와 이원조는 ‘응와선생문집’에서 “정자에 오르기 전에는 미처 물과 돌이 기이하고 원림의 뛰어난 경치를 알지 못한다”라고 말했다. 정자에 올라서야만 석천과 병풍바위의 가치를 제대로 읽을 수 있다고 하는 말이다.

재천정은 이근우가 벼슬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와 지은 정자다
재천정에서 보는 풍경은 기시감이 있다. 얼핏 병산서원 만대루에서 본 화천과 병산이 떠오른다. 강의 규모와 산의 크기, 백사장의 너비에서 차이는 있을지언정 정자 앞에 강이 있고 강 건너에는 산이우뚝하고 푸른 절벽 바위가 눈에 들어온다는 점이 비슷하다. 재천정 앞을 흐르는 냇물은 작괘천을 닮았다. 괴수모양을 한 기이한 바위들이 강물에 엎드려 있는 모습은 작괘천의 하얀 바위를 떠올리게 한다. 다만 석천은 강폭이 넓어 풍광이 분산되고 물흐르는 소리와 광경을 자세히 알 수 없어 아쉽다.

재천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맛배지붕 건축물이다. 건물 외부에는 모두 원기둥을 설치했다.앞쪽 마루에는 계자난간을 설치했고 짧은 누하주 기둥을 두어 출입을 하지 못하도록 했다. 출입은 뒤쪽으로만 하게 돼 있다. 동서 양쪽에 방을 두고 있는데 방의 벽장문이 마치 미술관 미술품 전시처럼 독특하다. 모두 4개의 벽장이 있는데 위의 왼쪽에는 작은 쌍문을, 오른 쪽에는 작은 외문을 배치했으며 아래에는 왼쪽에는 큰 문을 달았는데 왼쪽에는 외문을, 오른쪽에는 쌍문을 배치했다.

재천정 현판. 논어의 ‘공자냇가에 계실때’에서 따왔다
재천정 옆에 있는 석계서원(石溪書院)은 학성 이씨 1대조인 이예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지방 유림의 공의로 창건한 서원이다. 이예의 영정을 봉안한 상충사, 강학당인 경수당, 치지재 적실재 등이 있었으나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됐다. 1975년에 상충사와 경수당과 필동을 중건했다. 이근오는 1대조인 이예를 배향한 용연사 이건 사업에 적극 동참했다. 현재의 신정동 이휴정 일원에 있던 용연사를 석천리로 옮기는 사업이었다. 용연사는 석천리로 옮겨와 석계사로 이름을 바꿨고 현재의 석계서원이 됐다. 이근오는 경수당 앞에 회화나무 세그루를 심었다.

▲ 글·사진 김동완 자유기고가
석계사는 강학당과 사당으로 이뤄졌는데 강학당에서 강의를 맡은 사람이 반계 이양오, 이근오의 형이었다. 이근오는 이양오에게서 공부를 배웠다. 이양오는 석천의 상류인 대대리와 고연리 일원에 자리잡았다. 대대리와 고연리 앞을 흐르는 석천의 상류를 반계라고 불렀는데 이양오는 계곡의 이름을 자신의 호로 삼았다. 그런 연유에서인지 재천정 앞 소나무 숲에는 이양호의 시비가 세워져 있다.

차신 무용하야 세상이 버리시니
부귀를 하직하고 빈천을 낙을 삼아
일간모옥을 산수간에 지어두고
십년 일관을 쓰거나 못쓰거나
삼순구식을 먹거나 못먹거나
시름이 없으시니 분별인들 있을쏘냐
만사를 다 잊으니 일신이 한가하다

반계 이양호의 시 ‘강촌만조가’

이근오의 형 반계이양호의 시비와 재천정

김동완 자유기고가
서선미 기자 meeyane@kyongbuk.com

인터넷경북일보 속보 담당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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