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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호순병원 원장

평소에 건망증으로 더러 일을 저지르는 K 여사. 딸 결혼식 날 아침, 서둘러 단골 미장원에 갔는데 “오늘은 머리 손질 좀 하시고 파마하시고 염색 좀 하시면 훨씬 우아해 보이시겠어요, 호호호” 하는 미용실 원장 립서비스에, 딸 결혼식 깜빡 잊어버리고 파마하고 염색하고 느긋이 앉아서 여성 잡지 뒤적이고 있었답니다. 잡지에서 웨딩드레스 입은 모델을 보는 순간 갑자기 딸의 결혼식이 생각나 파마 머리말은 채로 딸의 결혼식장에 나타났던 K 여사. 실화입니다. 주위 사람들이 키득키득 웃는 창피함보다 가끔 까맣게 잊어버리는 건망증이 더 섬뜩했다는 K 여사의 말에 고개 끄덕이는 분 많을 겁니다. 부하 직원에게 단단히 화가 난 직장 상사가 부하 직원을 닦달하기 위해 불렀는데 직원을 앞에 두니 막상 기억이 안 나 “자네 왜 왔는가?” 하고 멍청히 쳐다본 경험, 건망증은 이렇게 사람을 곤란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것뿐인가요? 냉장고 안에서 전화벨이 울리고 고등어는 책상 위에서 비린내 풀풀 풍기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다 건망증 때문에 생기는 현상입니다. ‘건망증은 인생이 익어갈 때 생기는 양념입니다’라고 예기하고 싶어도 그 정도가 심하고 자주 반복된다면 인생의 양념이 아니라 걱정이 될 수도 있습니다.

‘기억’은 중요한 뇌 기능입니다. 기억이란 획득한 정보를 필요할 때 되살릴 수 있도록 ‘등록’하고 ‘저장’하고 ‘재생’하는 일련의 과정을 말합니다. 쉽게 설명하기 위해 냉장고와 물건에 대해 비유해 보겠습니다. 냉장고 용량은 일정한데 내용물이 많으면 다 넣지 못합니다. 냉장고가 낡은 것이라면 보관 성능이 떨어집니다. 냉장고 안에 오래된 물건이 많이 들어 있다면 새로운 것을 넣지 못합니다. 물건을 이것저것 순서 없이 집어넣는다면 제대로 성능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기억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기억이라는 고도의 뇌 기능에 문제가 생기면 기억장애가 옵니다. 기억에 문제가 생기면 삶의 어려움이 오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이것저것 시시콜콜 기억을 잘하는 것이 다 좋을까요? 사람이 살면서 고통스럽거나 우울했거나 당황스러웠던 기억까지 생생히 살아 있다면? 아마 정신병에 걸릴 겁니다. 그래서 ‘망각’이라는 기능이 있습니다. 이 망각이라는 기능도 기억만큼 중요 합니다. 그런데 남의 돈을 빌려 가서는 “미안해, 내가 건망증이 심해서…”하면서 잘 안 갚는 경우는 심리적 원인으로 나타나는 ‘기억의 억압 현상’이지 결코 기억장애가 아닙니다. 이런 사람일수록 자기가 빌려준 돈은 지나치게 기억 잘하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건망증과 기억상실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건망증은 정상적인 노화 과정일 수 있습니다. 건망증은 중요한 것을 잊어버리지는 않습니다. 또한, 누가 귀 뜸해 주면 금방 기억납니다. 그리고 스스로 건망증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치매 같은 기억장애 병은 다릅니다. 단지 잊어버리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시간, 장소, 사람에 대한 기억이 흐려집니다. 스스로 기억력이 나빠지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최근의 기억이 현저히 나빠집니다. 게다가 인격의 변화와 감정의 변화가 동반됩니다. 심해지면 방향감각 상실, 계산 능력 손상, 엉뚱한 답변과 행동 등의 증상들이 동반되는 것이 기억장애의 특징입니다. 그러니 건망증과는 큰 차이가 있지요.

단순한 건망증을 큰 병으로 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건망증 현상이 자주 반복적으로 나타난다면 꼭 지능검사, 인지능력검사, 기억력 검사를 받아보시기를 권유합니다. 요즘은 잦은 건망증도 ‘경도 인지 장애’라 칭하고 혹시 치매로 가는 중요한 길목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여 적극적으로 진단하기 위해 노력을 합니다. 왜냐면 치매라고 진단을 받고 나면 치료가 참 어려워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잦은 건망증은 결코 가볍게 볼 일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곽호순병원 원장
조현석 기자 cho@kyongbuk.com

디지털국장입니다. 인터넷신문과 영상뉴스 분야를 맡고 있습니다. 제보 010-5811-4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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