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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태의 고전시담]정몽주(鄭夢周) 춘(春)

김진태 전 검찰총장 등록일 2016년12월25일 16시2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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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태 전 검찰청장
春雨細不滴 (춘우세부적·봄비 가늘어 방울 짓지 않더니)
夜中微有聲 (야중미유성·밤이 되니 소록소록 소리 내네)
雪盡南溪漲 (설진남계창·눈 녹아 남쪽 시내 불어날 것이고)
多少草芽生 (다소초아생·어느 정도 풀싹은 돋아나겠지)


정몽주는 고려 말기의 충신이자 유학자로 자는 달가(達可), 호는 포은(圃隱)이다. 과거에 연이어 장원을 하였으며 이색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오부학당과 향교를 세워 후진을 가르치고, 유학을 진흥하여 성리학의 기초를 닦았다. 원·명 교체기에 명나라와의 외교 문제를 깔끔하게 해결했으며 왜국과의 관계에도 큰 공을 세웠다.

그는 친명파로서 이성계, 정도전 등과 의견을 같이하여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옹립했다. 그러나 이성계를 왕으로 세우는 이른바 역성혁명(易姓革命)은 분명히 반대하여 서로 정적이 되었다. 부상당한 이성계의 병문안을 위해 만난 이방원과 정몽주가 그 유명한 ‘하여가’와 ‘단심가’로 서로의 의중을 교환한 후 정몽주를 살려 둘 수 없다고 생각한 이방원이 조영규를 시켜 병문안을 마치고 돌아가는 정몽주를 선죽교에서 피살했다. 그러나 조선 개창 후 이방원은 정몽주를 영의정에 추증하고 ‘문충’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정몽주의 마지막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그는 이성계가 낙마하여 부상당하자 바로 이성계 세력을 제거하는 작전에 들어갔다. 이로 인하여 상대가 극도로 긴장해 있던 상황에서 그는 아무런 대비도 없이 단신으로 병문안을 갔고, 돌아오는 길에 피살되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일까. 그들은 동지였지만 사실은 서로를 너무 몰랐던 것이 아닐까. 아니면 나라의 안위가 개인의 생명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서일까. 설마 권력을 탐하여? 정몽주는 이성계 부자를 설득하면 고려 왕실은 그대로 둘 것으로 생각했고, 그렇게 하진 않더라도 설마 자신을 죽이기까지야 하겠느냐고 생각했을 것이다.

포은의 처지를 딱하게 여긴 어느 스님이 “강남 만 리에 들꽃이 만발했으니 봄바람 부는 어느 곳인들 좋은 산 아니겠소(江南萬里野花發 何處春風不好山)”라면서 피신을 종용했다는 이야기도 전해 오고 있지만, 확신에 사로잡혀 일을 하고 있는데 이런 이야기가 귀에 들어오겠는가.

산 자는 나라를 얻었고 죽은 자는 명예를 얻었으니 역사는 공평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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