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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살다 보면 불행(不幸)을 피할 수 없습니다.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게 인생인지라 대소 강약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불행 없이 평생을 살 수는 없는 법입니다. 사람들이 미신(迷信)을 믿는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때 없이 찾아오는 불행의 와중에서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마음’의 빈틈이 미신을 허용합니다. 절박한 사정이 있을 때 마지막으로 찾는 것이 ‘미지의 신비로운 존재나 그의 힘’이니까요. 그런데 미신 중에는 그런 ‘절박한 사정’과 거리가 멀면서도 횡행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른바 풍수지리설이 바로 그런 유입니다. 법안(法眼)이니 도안(道眼)이니 신안(神眼)이니 하면서 자손 대대로 발복할 명당자리를 찾아준다고 사람들을 꾑니다. 물론 결과에 대한 책임은 지지 않습니다. 풍수처럼, 인간의 죽음과 연관된 것들의 상거래에서는 ‘믿거나 말 거나, 아니면 그만이고’가 그 나름의 ‘신의성실의 원칙’이기 때문입니다.

풍수지리설, 특히 음택(묘지) 풍수가 나쁜 미신인 것은 그것이 계시(啓示)와는 정면으로 역행하는 행태를 보인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그럴듯해도 결국은 결과를 가지고 멋대로 끼워 맞추는 스토리텔링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우리가 종교를 미신과 구분하는 것은 종교가 계시를 중히 여기기 때문입니다. 구원이든 해탈이든 늘 계시와 함께합니다. 계시야말로 인간이 우주의 중심과 통하는 유일한 관문입니다. 그런데 풍수지리설은 전혀 계시를 모릅니다. 이를테면 이런 식입니다. 지금 잘 나가고 있는 정치가라면 그 시조 묘가 유어농파형(遊魚弄波形, 물고기가 물결을 희롱하며 노는 형국)’이라고 추켜세웁니다. 만약 세력을 잃고 와신상담 중인 사람이라면 방란임토형(芳蘭臨兎形, 비록 난의 줄기와 꽃이 뜯겼다 해도 뿌리는 상하지 않은 형국)을 갖다 붙입니다. 참 가소로운 행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걸 듣고 고개를 끄덕이는 이들은 더 무지스럽고요.

“죽은 조상 덕 보려는 못난 후손들이나 음택 풍수에 기댄다, 진정한 풍수는 비보(裨補, 모자란 것을 채움) 풍수다”라는 최창조 교수의 말을 저는 좋아합니다. 흔히 말해지는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 귀한 닭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이니 유어농파형이니 방란임토형이니 좌청룡 우백호니 하는 것들은 미신입니다. 백보를 양보해도, 그것은 불행에 즉해서 생겨난 어쩔 수 없는 ‘간절한 믿음’이 아닙니다. 기껏해야 ‘공짜를 바라는 허황된 심리’에 불과합니다. 그런 것들이 결국은 어리석은 순응주의로 우리를 이끕니다. 무지한 것들, 몽매한 것들이 우리의 삶을 약탈하는 것을 기꺼이 도와주는 내부의 적이 됩니다. 그런 눈에 보이지 않는 해악들이 하나둘 모여서 지금 여기에서의 삶을, 지금처럼, 형편없는 것으로, 조악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최근 우리가 겪고 있는 정치적 상황을 ‘불행’이라고 평한다면 지나친 동정론, 혹은 비관론일까요? 크게 보면 우리가 모두 불행에 직면한 상황입니다(얼마 전에는 탄핵 소추된 대통령이 말한 ‘피눈물’을 두고 설왕설래가 많았습니다). 죄를 추궁하는 쪽에서나 벌을 모면하고자 하는 쪽에서나 행복한(신나는?) 표정은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습니다. TV를 통해서 매일매일 신기하고 놀라운 뉴스를 대하는 선량한 시민들도 전전긍긍, 좌불안석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기가 차고, 허탈하고, 우울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전체적으로 불행하게 살아야 할 이유가 무엇일까요? 답은 하나입니다. 미신, 혹은 미신에 준하는 것들에게 현혹되어 살아온 탓입니다. 이제 그것들과의 깨끗한 작별을 결행해야 할 때가 온 것 같습니다. 미련 없이, 온갖 미신들을, ‘억지로 끼워 맞추는 스토리텔링’들을, 깡그리 쓰레기통에 갖다 버릴 때가 왔습니다. 정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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