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 잃은 한에 지역서 첫 만세운동 일으킨 우국 충정의 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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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예안은 역사적으로 연원이 깊은 마을이다. 예안(禮安)은 예가 땅을 뜻해 ‘기름진 땅’이라는 뜻을 가진 살기 좋고 편안한 마을이었다. 예로부터 각종 농산물이 풍부하고 삼재(三災)를 당하지 않는 곳이기도 했다.

유구한 역사와 함께 수많은 명현이 탄생했고, 나라가 어려울 때는 들불처럼 일어난 우국 충절의 고장이다. 또한 효제(孝悌) 하는 도가 가문마다 풍습을 이뤄 예안은 동방문화의 으뜸가는 고을이라 전해진다.

일제 이전에는 안동과 독립된 ‘예안현’이라는 행정구역이었으며, 조선 성리학의 집성 지로서 이현보, 이황, 조목 등 많은 인재를 배출하여 ‘추로 지향’으로 불렸다. 실학자 이중환은 예안을 “신이 가르쳐준 복된 지역”이라고 일컬었다.

예안향교
□ 산성 지와 예안 향교

조선 시대에는 군마다 국립 교육기관인 하나의 향교를 두었는데, 예안 향교는 1411년 태종 11년에 창건됐다. 1894년 갑오개혁 이후에는 신식 학제가 시행돼, 교육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 기능만 남아 있다. 지금은 행정구역 개편으로 도산면에 위치한다.

예안의 역사를 알 수 있는예안 없지지 ‘선성지’는 1619년경 월천 조목 선생의 제자 권시중이 작성한 것으로 전해진다. 안동부의 전 지역을 수록한 ‘영가지’ 보다 이른 시기에 만들어졌다.

‘영가지’의 경우 안동 전역 중에서도 예안현 지역은 제외하고 있다. 이는 현대에 왔어도 유림 행사 때에 그 관할권을 철저히 존중하는 예를 보더라도 예안현은 엄연히 독립된 지역임을 알 수 있다.

선성(宣城)은 고려시대 때 불리던 예안의 이름이다. ‘선성’이라는 이름은 “고려 태조가 견훤을 토벌할 당시 성주인 이능선(李能宣)이 왕건을 도왔다. 그러자 왕건은 그 의리를 가상히 여겨 그의 이름에서 ‘宣’을 따서 ‘선성’이라 읍호를 칭했다”고 선성지에 기록돼 있다.

□ 항일투쟁의 성지 ‘예안’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단발령 공포 소식이 전해지자 안동에서는 의병봉기를 촉구하는 통문이 나오기 시작했다. ‘예안통문’은 안동지역 첫 통문이며 223인이 서명했다. 이후 예안 출신 김대규, 김차준, 남준이 등이 의병투쟁에 나선다.

안동지역에서 애국계몽운동을 이끈 혁신유림에는 이상룡, 김동삼, 류인식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중 예안 주진 삼산마을 출신인 류인식이 있다. 류인식은 경북 북부지역 계몽운동의 효시인 협동학교를 설립한다.

1905년 을사조약 이후 전국에서 목숨을 끊은 순절자는 90여 명, 이들중 이름과 출신이 알려진 인물이 70여 명, 이들 가운데 안동 출신은 10명에 이른다. 예안 부포 출신인 이명우는 그의 부인 권성과 함께 나라 잃은 한을 참지 못해 자결한다. 독립운동사에서 부부가 함께 자결한 사례는 유일하다.

안동지역에서 대규모 군중들이 처음으로 만세운동을 일으킨 곳이 예안이다. 1919년 3월 17일과 22일 두 차례에 걸쳐 일어났다. 신상면을 중심으로 예안장날 1차 시위에는 1천500여 명이 참여했고 22일 예안 동부동과 서부동 2차 시위에는 2천여 명이 참여했다. 이날 경찰의 발포로 13명이 부상을 입고 50여 명이 재판에 회부돼 실형을 받았다.

1910년 나라를 잃자 안동의 많은 애국지사와 가족들은 만주 등지로 망명길에 올랐다. 나라 밖에서 항일투쟁을 펼친 예안인 애국지사는 권순, 김우상, 류기준 외에 10여 명에 이른다.

수몰전 예안면 모습.
□ 수몰 40년, 실향민의 애환

예안에는 예안향교를 비롯해 선성과 석빙고, 고려말 대학자인 역동 우탁 유허비, 역동서원, 광산김씨 예안파의 외내 군자마을 등 수많은 유적이 산재해 있었다.

하지만 1974년 안동댐 건설로 인해 유적들은 옮겨 세우고, 넓은 토지와 삶의 터전은 조국 근대화라는 명분아래 헐값에 넘겨야만 했다. 당시 댐 건설로 수몰된 면적은 51.5㎢에 이르렀고, 이주민 수는 3천134세대 2만664명이나 됐다. 이는 당시 안동군 인구의 12.5%에 이른다. 지금도 넓은 면적에 비해 인구는 최저 수준이다. 그만큼 척박한 생활환경을 갖고 있음을 의미한다.

□ ·예안면 출신 인물들

월곡면과 예안면을 통합한 지도 40년을 넘겼다. 지금도 전국 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지만 ‘마음 속의 고향’은 하나다.

△ 정산리
정산시장이 들어선 자리를 예전에는 억산, 억새라 불렀다. 옛날 이곳에 억 부자가 살았다고 한다. 김호진(전,노동부장관), 권영규(전,서울시 행정부시장), 김동하(전,부장판사), 권상만(전,보건복지부 행정사무관), 이두환(전,안동시의회 의장) 등이 이 마을 출신이다.

△ 기사리
이 마을은 산기슭에 형성돼 지실이, 지시러기 등으로 불리었다. 고려말 권정이 이곳에 은거한 후 기사촌이라 불려졌다. 강신걸(현,마포경찰서장), 박찬록(현,대검찰청 보호법제과장), 신승국(전,의성군수), 조경환(현,국가정보원 이사관), 조봉환(현,기재부 이사관) 등이 이마을 출신이다.

△ 미질리
수몰전 월곡면의 중심지다. 땅이‘기름지고 아름답다’하여 미질이라 칭했다. 권오진(전,지방서기관), 김만연(전,해운대구청장), 김시년(현,지방사무관), 김윤한(전,지방서기관), 김은한(현,안동시의원) 등이 이 마을 출신이다.

△ 도목리
산천이 그윽하고 아름다움이 마치 무릉도원 같고, 복숭아꽃이 많아 도목이라 불렀다. 남기찬(현,종합물류기술지원 센터장), 조은희(현,서초구청장),김홍서(현, 미래창조과학부 서기관), 남영찬(전,대법원 판사), 남재철(현,기상청 차장), 남해찬(현,동작세무서장), 남호성(현,행안부서기관), 남윤찬(현,안동시의원) 등이 이 마을 출신이다.

△ 주진리
배 나루터가 있어 배나들이라 불렀다. 고려말 동래 정씨 한 선비가 개척했다 전해진다. 강민창(전,치안본부장)이 이 마을 출신이다.

△ 천전리
이 마을은 고려 공민왕 때 광산 김씨가 마을을 개척했다. 임하면의 내앞마을처럼 마을 앞엔 낙동강이 흐르고 있다. 김계진(전,통일부 서기관), 김석규(현,국방부 서기관), 김용륜(전,부군수) 등이 이 마을 출신이다.

△ 부포리
들이 넓고 장수하는 사람이 많았다. 큰 비로 마을에 물이 들어, 들이 마치 물에 뜬 것 같다하여 부포라 했다. 이동기(현,서울대교수), 이원장(전,육군준장), 이동삼(현,영화감독), 이동우(현,변호사), 이현종(현,국회 국방위입법조사관) 등이 이 마을 출신이다.

△ 귀단리
산을 한바퀴 돌아가니 또 마을이 있다하여 귀단이라 칭했다. 김정동(현,대구한의대교수), 김일동(전,대구시 구의원), 김태명(현,우성전기 대표), 김시동(현,시인), 김정례(현,외환은행지점장), 김종기(현,검찰청서기관) 등이 이 마을 출신이다.

△ 태곡리
예안면의 북쪽에 위치하며, 마을 뒤에 태봉이 있어 태곡이라 부른다. 금춘수(현,한화부회장), 권영섭(현,용산구청 서기관), 금경수(대정산업 대표), 심중보(현,지방서기관), 이동균(현,경북농업기술원 서기관), 이동백(시인,수필가), 등이 이 마을 출신이다.

△ 삼계리
성황리 앞에 세 내가 합쳐져 흘러간다고 삼계라 한다. 금용환(현,교육부 학교정책실장), 금차용(현,지방농촌지도관), 신응철(현,경성대교수), 심용락(대경사료 대표), 심용창(전,통일부서기관), 심주걸(현,국정원이사관) 윤종한(현,대구시 서기관), 이상년(전,초대 안동읍장) 등이 이 마을 출신이다.

△ 신남리
예안면에서 가장 북쪽에 위치한다. 위치가 산성 남쪽에 있어 신남리라 했다. 강성도(현,산림청 서기관), 권동태(전,국무총리실 국장), 김미영(현,육군본부 검찰관), 김병두(현,변호사), 김태완(현,홍콩대교수), 신종훈(인천아시안게임 복싱금메달리스트), 이강원(현,한국생산기술연구원 교수), 이원욱(현,세무사), 이학연(전,중소기업은행 지점장) 등이 이 마을 출신이다.

이밖에 현 이재명 성남시장이 도촌리 출신이며, 구룡리의 이재욱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장, 계곡리 전 외환은행 지점장 등이 있으며, 김경한 전 법무부장관, 재경 안동향우회 4대 회장을 역임한 신현수 장군이 예안면 출신이다.

오종명 기자
오종명 기자 ojm2171@kyongbuk.com

안동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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