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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정체성을 말한다] 14.충절의 표상, 포은 정몽주

유학적 이상 세계 꿈꾸며 고려왕조와 운명을 함께하다

홍순석 경남대 교수 등록일 2016년12월29일 17시39분  
▲ 임고서원

포은 정몽주(1337~1392)가 활동하였던 14세기는 동아시아사상 대격동기였다. 원나라의 붕괴가 가속화되면서 대륙은 홍건적의 봉기와 한족 반란군의 할거로 내란상태였다. 일본 남북조의 분열과 쟁란에 편승한 왜구의 출몰로 한반도 서남해안 일대는 전쟁을 방불케 하는 상황이었다. 사상적으로도 송대의 성리학사상이 동아시아 보편적 유교사상으로 등장했고 그 영향력을 주변국가에 확대해갔다. 백여 년간 원나라를 중심으로 전개되어온 동아시아 국제질서에 변화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고려왕조도 두 차례에 걸친 홍건적의 침입, 왜구의 발호로 인해 국토는 유린되고 국가의 존망마저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이 시기에 포은은 문신이면서도 관료로서의 행보를 전장(戰場)에서 시작하였다. 홍건적 침입 때 왕을 시종하여 안동으로 피신하였는가 하면 왜구·여진의 토벌에 이성계와 함께 종군하는 장수의 면모까지 보였다. 전장에서 목도한 백성들의 참담한 모습은 그의 정치관에 깊게 영향을 미쳤다. 포은은 여러 차례 중국과 일본 사행에 올라 외교관으로서의 뚜렷한 업적을 남겼다. 포은의 사신으로서의 활동은 타협과 협상을 위주로 하는 외교적인 측면에서 이루어졌다. 이 역시 전장에서 백성들의 곤궁한 처지를 절감한 경험에서 기인한 것이다. 포은의 정치적 행보도 결국은 백성들 편에서 실천되었다. 전제개혁은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 포은영정(보물제1110호)
△이성계와의 만남, 반목, 그리고 죽음

포은의 생애에서 주목되는 시기는 공양왕 때이다. 우·창왕의 폐위와 공양왕의 추대에 이성계와 정치적 노선을 같이하고, 이색을 중심으로 하는 세력과 결별하면서 고려왕조의 사직을 보존하기 위해 절치부심하였던 시기이다. 포은은 내정개혁의 측면에서 보면 정도전과 같은 입장이었으나, 역성혁명에 반대했다는 관점에서 보면 이색과 정치적 입장이 같았기 때문에 양자의 어느 편에도 완전히 포함시킬 수 없다.

포은은 친원세력의 견제에 있어서는 이성계 세력과 함께 하였으나 고려왕조의 존립을 위해서는 이성계 세력의 반목과 견제를 계속하며 부단히 노력하였다. 이른바 ‘윤이·이초의 사건’을 계기로 이성계 세력의 고려의 부정과 신왕조 개창 의지가 자연스럽게 드러나자 포은은 ‘우창당’ 인물의 사면을 건의하고, 구세력과 재결합을 시도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포은은 고려왕조를 존속시키려는 세력의 중심에 있게 되었다.

포은과 이성계로 대표되는 양 세력은 고려왕조의 존립과 역성혁명을 둘러싸고 첨예한 정치적 갈등을 드러냈다. 포은은 이성계 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여러 조치를 단행하였다. 1392년(공양왕 4) 3월, 김진양 등에 의해 이성계 세력은 먼 지방으로 유배되어 와해될 기로에 서게 되었다. 이에 위협을 느낀 이성계 세력은 4월 이방원의 주도아래 포은을 선죽교에서 격살하였다. 이성계 세력은 포은을 제거함으로써 신왕조 개창을 위한 최대의 걸림돌을 제거한 것이다. 이어서 ‘정몽주당’의 숙청을 단행함으로써 고려왕조는 역사에서 사라지게 된다. 결국 포은의 피살은 곧바로 고려의 종말을 의미하게 된 것이다.

선죽교
△정명사상에 근거한 포은의 외교, 개혁정책

포은사상의 근간은 유가의 정명사상이다. ‘정명(正名)’ 이란 모든 국가 구성원이 자기의 본분과 의무와 권리를 다하고 자신에게 알맞은 몸가짐을 하는 것을 뜻하며, 정치의 성패를 좌우하는 객관적 준거이다. 다시 말해서 정명은 사람들이 삶의 진정한 의미를 획득하고 보전할 수 있도록 ‘권한의 구분’을 명백히 하여 생활에 질서가 서게 하는 일이다.

포은에게 고려 말의 사회는 가치질서가 붕괴되어 혼미를 거듭할 때였다. 즉, 사회에 올바른 도가 행해지지 않는 위기적 상황이었다. 포은에게 ‘정명’의 강조는 바로 이러한 위기의식의 바탕에서 그가 추구한 현실 극복의 지표이며, 실제 정치 문제에 대한 기본 관점이다. 명분을 바로 잡는 일은 인간이 선천적으로 갖추고 있는 윤리적?도덕적 원칙을 회복하고 인간사회의 무질서를 극복하여 올바른 사회적 관계를 확립하는 일이 된다.

포은은 원명(元明) 교체기에 새로운 대중(對中) 외교와 왜구문제 해결을 위한 대일(對日) 외교로 많은 기간을 보냈다. 7-8년간 성균관 교관으로 활동했고, 5-6년간 외교활동을 했다. 그리고 3차례에 걸친 종군활동을 통해 14세기 고려가 직면한 대내외적인 문제와 직접 대면하였다.

포은의 정치적 행보는 백성들 편에서 실천되었다. 전제개혁, 교육개혁, 제도개혁 등에서 그같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사대부나 서민들로 하여금‘가례’에 따라 제사를 받들게 하였으며, 몸소 실천하였다. 지방수령을 청렴하고 물망이 있는 사람으로 뽑아 임명하고 감사를 보내 출척을 엄격하게 했으며 도첨의사사에 경력과 도사를 두어 금전과 곡식의 출납을 기록하게 하였다. 오부학당과 향교를 두어 교육진흥을 꾀하였다. 기강을 정비해 국체를 확립하였으며 쓸데없이 채용된 관원을 없애고 훌륭한 인재를 등용하였다. 의창을 다시 세워 궁핍한 사람을 구제하고, 수참(水站)을 설치해 조운(漕運)을 편리하게 하였다. 종당에는‘신율(新律)’을 만들어 법질서를 확립하려고 힘썼다. 그의 이같은 개혁정치는 기울어져가는 고려의 국운을 바로잡으려는 결단이었다.

숙종어제어필첩


△조선시대에 역신에서 충신으로 재평가 되다

포은은 조선건국 초기엔 역신·간신에 불과했다. 아이러니하게도 포은을 선죽교에서 격살케 한 태종 에 의해 신원되고 충신으로 재평가 되었다. 신왕조의 안정을 위해서는 왕권 강화와 이를 뒷받침할 신료들의 충절·의리가 절대적이었기 때문이다. ‘선비의 나라’ 조선에서 ‘의리’와 ‘명분’의 표상으로 부합한인물이 바로 포은이라고 인식한 것이다. 포은은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부사 수문전대제학 겸 예문관 춘추관사 익양부원군에 증직되고 ‘문충’이라는 시호를 받게 된다. 세종 때 찬진된 ‘삼강행실도’의 ‘충신전’에 올랐다. 문종 때는 숭의전에 배향되었다. 사대교린에 입각한 대외관과 가묘·오부학당·향교·의창의 설치는 성리학의 이념을 실천한 업적으로 평가되었다. 그 결과 1510년(중종 5) 문묘에 종사하게 되었다. 그리고 정몽주→길재→김종직→김굉필→조광조→이언적→이황으로 이어지는 조선 성리학의 도통론으로 완성되었다. 급기야 동방성리학의 조종으로 추숭되었다. 조선 후기 당파의 혼란기에서도 포은에 대한 배려에는 반론이 없었다. 특히 송시열은 포은의 현양사업에 총력을 기울였다. 뒤이어 이재 역시 포은의 절의를 현양하는데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다.

유성룡은 포은을 평하여 “나라가 있을 때 함께 있었고 나라가 망할 때 함께 죽었다(國存與存, 國亡與亡)”고 하였다. 후학들은 포은을 “정명사상을 바탕으로 유학적 이상 세계를 이루고자 하였던 인물”이라 평한다. 선비의 나라를 자처했던 조선에서 가장 중시되었던 기치가 ‘정명’이다. 조선건국의 명분을 확립해야 할 이유와, 조선을 위한 ‘충절’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바로 포은이 선비의 나라 조선에서 다시 각광을 받은 이유이다. 포은의 ‘충절’은 훗날 국난이 있을 때마다 선비들의 삶의 지표가 되었으며, 만세의 사표가 되었다. 포은의 이러한 사상과 실천은 지금 대한민국에서도 절대시된다. 현재의 우리에게도 선죽교와 ‘단심가’가 또렷이 기억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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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순석 교수 약력

△강남대학교 국문과 교수(한국한문학전공) △인문과학연구소장 △포은학회 회장.

포은선생 관련 저술로‘포은유적대관’,‘포은종가’가 있으며‘포은정몽주의 단심가 연구’를 비롯해 10여 편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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