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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인생선’(人生線·1942)이란 옛노래가 있습니다. 남인수 선생이 부른 노랜데 ‘인생이 철길이냐, 철길이 인생이냐’라는 가사로 유명합니다. 인생은 결국 ‘길 위의 삶’이라는 겁니다. 생각해 보니 저도 꽤 먼 길을 걸어왔습니다. 그 생각과 함께한 질문이 떠오릅니다. “젊은 시절로 되돌아가고 싶으냐?”라는 질문입니다. 10년 전쯤 유행했습니다. 저도 그랬지만, “아니, 지금이 좋다”라고 답한 이들이 많았습니다. 그만큼 저희 세대의 초년 시절이 호락호락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되돌려 받을 청춘도 좋지만 견뎌야했던 삶의 무게가 훨씬 더 고달팠다는 얘깁니다. 요즘 다시 그런 질문을 받는다면 조금 간사한 대답을 내놓겠습니다. “결과가 이렇게 될 것을 안다는 조건이면 과거로 돌아가고 싶다”라고요. 다시 젊은 날로 되돌아가서 불미스럽고, 미진하고, 미흡한 것들을 반듯하게 바로잡고 싶습니다. 후회막급인 것이 한둘이 아닙니다. 학창 시절 내내 열악한 환경과 싸워야 했습니다. 물론 단 한 번도 이겨본 적이 없습니다. 일방적으로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노예적 삶을 청산한 것은 한참 뒤의 일입니다. 제 경우는 소설가로 입신하면서부터 좀 나아졌습니다. 그렇다고 팔자가 완전히 펴진 것은 아닙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도 상처받고 상처 주는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 다만 확실히 노년에 접어든 작금에 들어서는 ‘후회로 남을 일’들과 좀 소원해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한 서평가가 최근에 낸 제 책을 ‘노소설가의 통찰’이라고 불러서 실소를 금치 못하기도 했습니다).

상처와 소원해진다고 인생살이가 마냥 수월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근자에는 일모도원(日暮途遠·해는 저물고 갈 길은 멀다)이라는 말이 또 제 인생선의 플랫폼 구실을 합니다. 사실 이 말은 40대 때도 모종의 지남(指南·가리켜 지시함) 역할을 했던 것이었습니다. 모든 변화는 내 몸에서 비롯된다고 여기고 오직 운동을 통한 몸 바꾸기에만 매진할 때 자주 등장했던 말입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때는 그 말의 진정성에 적극적으로 부합하지 못했었습니다. 내 몸 하나 건사하기 바빴고 허영이나 허세도 간간이 끼어들곤 했습니다. 반성하자면 그렇습니다만 어쨌든 그때 제가 손해 본 것은 없었습니다. 그 물물교환(몸 바꾸기를 위해 다른 것을 희생한)의 덕으로 지금껏 버티고 있습니다. 다시 제 인생선을 찾아온 일모도원은 옛날과는 다른 것을 요구합니다. “선한 사람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를 논하는 것은 이제 그만하고 선한 사람이 되도록 하라”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말을 자주 연상시킵니다. 문득문득, 혼자 가는 길은 인생선이 아니라고 꾸짖기도 합니다.

“내가 생각하기엔, 만약 악마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아서 인간이 창조해 냈다고 한다면 인간은 자기 모습과 비슷하게 그걸 만들어냈을 거야.” “그렇다면 신(神)의 경우도 마찬가지죠.”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나오는 형제간의 대화입니다. 악마가 없었으면 신도 존재하지 않겠지요. 마찬가지로, 감당할 수 없는 악의 존재를 목격하고서도 신을 부르지 않는다면 그는 인간이 아닙니다. 신은 인간 없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는 인간에 내재합니다. 때로는 계시로, 때로는 기적으로 나타나지만, 신의 본질은 선(善)입니다. 만약, 악처럼 인간이 스스로 자신 속에 내재한 선을 완전히 이해하고 신뢰할 수 있다면 인생선의 험난한 여정은 끝내 허무하지 않을 것입니다. 선이든 구도(求道)든, 지향점을 지닌 인생선은 그래서 언제나 출발점입니다. 직장 동료 한 사람도 몇 년 전 그 길을 걷고 왔다고 했는데, 며칠 전 한 지인으로부터도 “금년에는 꼭 산티아고 순례길에 나서야겠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최소 한 달 이상은 걷는 길입니다. 멋진 일이겠습니다. 특히 석양을 보면서 그 오래된 길을 걷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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