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런 기척도 없이
가랑비가 내리던 날이었다

누가 거기 두고 갔는지
이 빠진 사발은

똑, 똑, 똑, 지붕의 빗방울을 받아
흙먼지 가득한 입을 열었다

그릇의 중심에서
출렁이며 혀가 돋아나

잃었던 소리를 되살려 놓는 것
둥글게 둥글게 물의 파장이

연이어 물레를 돌리자
금간 연꽃도
그릇을 다시 향기로 채웠다

사람을 보내놓고 허기졌던 빈집은
식은 입술을 사발에 대고
무너진 배를 채웠다


<감상> 처마 아래로 떨어지는 빗물을 손바닥으로 받던 때가 있었다 다 채워지기도 전에 빠져나가는 빗물을 놓치지 않기 위하여 작은 손을 오므리고 또 오므렸던 때 그것은 손바닥에서 피어나는 꽃을 보기 위함이었다 고인 빗물 위로 빗방울이 떨어질 때 손바닥 안에서 피어나던 빗방울꽃 그 꽃으로 허기진 가슴을 채우곤 했다 (시인 최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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