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 딛는 순간 타임머신 타고 조선시대 온듯한 환상에 빠진다
이휴정은 울산광역시 남구 신정 1동 주택가 깊숙이 자리잡았다. 정자 뒤로 엄청나게 높은 고층 아파트가 산처럼 둘러쳐져 있는데다 주위가 온통 주택가 여서 정자에 발을 딛는 순간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조선시대로 들어온 듯한 환상에 빠진다. 학성이씨 월진파 문중에서 관리를 하는데 상당히 관리가 잘 되고 있다. 정자 옆으로 키큰 소나무와 오래된 배롱나무가 시립해 있고 정면 3칸 측면 2칸 필작지붕 형태의 정자는 잘 단장돼 있다. 기대했던 태화강물도 십리대숲도 도심에 가려 볼 수 없었다.
이동영은 생원에 급제하고 성균관에서 수학한 뒤 고향 울산에 내려와 후학 양성에 힘을 쏟는다. 그의 할아버지 난은 이한남은 임진왜란때 혁혁한 공을 세운 뒤 선대가 살던 곳을 떠나 태화강을 건너 월진 지역으로 옮겨왔다. 은월봉 아래 정자를 짓고 지은정(志隱亭)이라 이름했다. 이동영은 할아버지의 지은정이 소실된 자리, 황룡연이 보이는 태화강변에 정자를 짓고 산과 물, 즉 은월봉과 태화강의 아름다움을 취한 정자라는 뜻으로 이미정(二美亭)이라 했다.
1664년 어느날 이동영이 이미정에 있는데 지나가는 과객이 왜 정자 이름을 이미정이라 했는가라고 물었다. 이동영은 정자가 이수삼산(二水三山) 사이에 있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그러자 과객이 이수삼산 사이에 있다면 오미정(五美亭)이라 해야 마땅하다 라고 말했다. 그는 덧붙여 말하기를 “그대의 할아버지 난은공이 산수간에 머물면서 호탕하게 살았는데 이러한 것을 휴산휴수(休山休水)라 한다”라고 했다. 그리고 벽에 ‘산과 산이 아름답고 아름답다. 이 아름다운 곳이 더욱 아름답다. 물과 물이 아름답고 아름답다. 그 아름다운 곳이 더욱 아름답다’라는 글귀를 남기고 떠났다. 그가 직지사 박세연이었다. 이동영은 즉시 현판을 이휴정으로 바꿨다.
이동영은 이휴정에 기거하면서 눈에 보이는 아름다운 풍경 8가지를 골라 ‘이휴정 팔경’을 지었다. ‘화강야월’ ‘월하봉조’ ‘이화노수’ ‘삼산낙조’ ‘양사모종’‘연포귀범’ ‘염시청연’ ‘학성청람’이다.
인간 세상 멀리하고 쉼없이 청가를 읊고자 하니
얼음처럼 맑고 둥근 달은 하늘 끝을 빙빙 도네
적막한 가을 강은 옥녀굴을 이루었고
강 가운데 은은한 어부들의 노래 소리 흥을 일으키네
- 화강야월 / 밤에 태화강에 비친 달 -
비인 듯 구름인 듯 가랑비 휘날리고
바람 따라 나부끼는 아침 해를 보는구나
잠시 뿐인 청명정기 얻어
초목이 군생하여 제각기 빛을 내네
- 월봉조하 / 은월봉의 아침 안개
이동영은 1667년 병을 얻어 3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다. 이휴정이 있던 자리에는 학파 이예를 배향하는 용연사가 지어졌으나 1782년에 웅촌면 석계리로 옮겨 가면서 일제 강점기 까지 빈자리로 남아 있었다.
이휴정 옆에 있는 용연서원은 학성이씨 시조인 학파 이예를 배향하는 곳이다. 이예는 울산 관아의 중인 계급 아전 출신이다. 1396년 자신이 모시는 군수가 왜구에 붙잡혀가자 군수를 구하기 위해 자진하여 대마도까지 잡혀간 후, 결국 군수와 함께 조선으로 돌아왔다. 그 공으로 신분을 올려주고 벼슬을 하사하였다. 이예는 이후로 40여 차례가 넘게교토, 큐슈, 오키나와, 대마도 등에 파견되었는데, 71세의 노년에도 대마도에 붙잡혀간 조선인 귀환 협상을 위해 몸을 아끼지 않았다. 외교관으로 활약한 43년 동안 지략과 협상을 통해 667명의 조선인을 일본으로부터 귀환시켰다. 용연서원은 강당과 동,서재가 있는데 서재인 온고재에는 서원 건립당시 발굴된 ‘학성 이천기 일가묘 출토복식’이 전시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