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여진만 561차례…시민들, 재난영화 ‘판도라’ 실제로 재연될까 우려

경주시 사정동 한 주택에서 한 할머니가 사과, 생수, 외투와 담요 등 ‘비상 배낭’을 침대 옆에 두고 생활하고 있다. 연합
“잊을 만하면 찾아온다. 지진에 익숙해질수록 재앙에 대한 공포는 더 커진다.”

잦은 지진이 영남권 주민들을 끈질기게 괴롭히고 있다.

경북 경주에서 규모 5.8의 지진이 발생한 지 4개월가량이 지났지만, 진동이 감지되는 여진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이 작은 흔들림은 심리적 대공황을 겪었던 그 날의 기억을 상기시킨다.

지진의 공포는 일상의 풍경도 바꿨다.

식량과 옷가지 등으로 꾸린 비상 배낭을 늘상 차에 싣고 다니고, 아파트 고층의 로열층보다 저층을 선호하는 현상도 생겼다. 높은 곳에 걸렸던 액자나 화분은 떨어질 우려가 없는 바닥에 자리를 잡았다.

전문가들은 “지진에 따른 불안감은 정상적인 반응”이라면서 “지나친 공포감에 집착하지 말고, 현실적인 생활 속 대비책으로 안정을 찾아야 한다”고 조언한다.

◇ 4개월 지났는데 아직도 흔들려…지진은 ‘생활의 일부’

지난해 9월 12일 발생한 규모 5.8의 경주 지진 이후로 이달 6일 새벽 규모 3.3과 2.2의 여진이 잇따라 발생하기까지 4개월이 채 안 되는 기간에 총 561회의 여진이 이어졌다.

사람이 진동을 느낄 수 있는 규모 3.0 이상만 20여 회에 달했다.

특히 작년 10월 10일 이후로 2개월 동안 잠잠하던 규모 3.0 이상은 12월 12일과 14일, 올해 1월 6일 등 모두 3차례 발생하면서 지진의 공포를 되살렸다.

진앙인 경주는 물론 대구, 울산, 부산, 경남의 주민에게 이제 지진은 일상의 한 부분이 됐다.

울산시 남구에 사는 이모(53)씨는 비상용 식량과 물품을 넣은 배낭을 차 트렁크에 아예 싣고 다닌다. 그는 보름에 한 번꼴로 배낭을 풀어 식량을 새것으로 교체하고, 라디오와 손전등 배터리를 수시로 점검한다.

이씨는 “다행히 별 피해가 없는 여진이 이어지고 있지만, 언제 큰 지진이 올지 알 수 없다는 생각에 배낭을 꾸렸다”면서 “실제 대피하는 상황을 상상해보니 집보다는 차가 낫겠다 싶어 집에 있던 배낭을 차로 옮겼다”고 밝혔다.

부산시 수영구 주부 김모(37·여)씨는 네 명의 가족이 착용할 헬멧을 사 아파트 현관문 옆 신발장에 보관하고 있다. 생수, 라면, 손전등, 구급약 등을 넣은 가방 옆에 헬멧을 추가한 것이다.

김씨는 “뭔가 대비를 했다는 생각에 다소 든든하지만, 해를 넘겨도 이어지는 여진에 불안한 마음은 여전하다”고 말했다.

경북 포항시민 손모(70)씨는 벽에 걸려있던 액자를 모두 바닥에 내려놨다.

손씨는 “지난번 지진 때 아끼던 편액들이 떨어질 뻔했다”면서 “액자는 치웠지만 지금도 지진을 느끼고 나면 머리가 어지러워 움직이기 힘들다”고 호소했다.

지진 이후 아파트 저층을 선호하는 사람도 늘었다.

울산혁신도시 아파트를 주로 취급하는 한 공인중개사는 “지진 이후 17층을 내놓고 3층으로 이사한 손님이 있다”면서 “아파트를 구하면서 가격이 아니라 지진 때문에 저층을 찾는 손님들이 생겼다”고 설명했다.

경주 동천동에 사는 장모(39·여)씨는 “지진이 발생하기 전에는 당연히 꼭대기에 가까운 로열층을 선호했지만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다”면서 “전세살이를 끝내고 내 집을 마련할 때는 꼭 걸어서 오르내릴 수 있는 저층을 살 것”이라고 강조했다.

◇ “영화 ‘판도라’가 현실로?”…커지는 트라우마

전례 없는 강진과 여진을 경험한 영남권 주민들은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

울산 북구의 정모(35·여)씨는 “여진을 느끼거나 뉴스로 접할 때마다 최근 관람한 영화 ‘판도라’가 떠오른다”면서 “실제로 최악의 지진을 경험한 터라 영화가 현실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불안감이 커졌다”고 말했다.

‘판도라’는 규모 6.1의 지진으로 설계수명 40년이 다 된 노후 원전에서 재앙이 일어나는 내용의 영화다.

경주시민 최모(32·여)씨는 여진을 느끼고 잠에서 깬 경험이 몇 차례 있다. 그렇게 잠을 깨면 가슴이 뛰어서 한동안 잠을 이루지 못한다.

최씨는 “지난해 9월 12일 약 1시간 간격으로 강한 지진이 발생했던 기억이 또렷하다”면서 “약한 여진을 느끼면 더 강한 지진이 올까 봐 한참동안 불안해한다”고 털어놨다.

잦은 불안감과 공포감은 ‘상상 지진’과 같은 증세를 낳기도 한다.

울산에 사는 정모(38)씨는 “엘리베이터가 덜컹거리거나 위층에서 소음이 들리면 주변의 사람에게 ‘지진 아니냐’고 묻는 버릇이 생겼다”면서 “노이로제에 걸린게 아닌지 걱정된다”고 말했다.

◇ “불안감은 당연한 반응…안전 대비책 마련이 도움”

지진 공포를 겪은 후 실제로 몸이 흔들림에 민감해진다거나 진동이 없는 데도 진동이라고 착각하는 사례 등은 모두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증상의 하나인 ‘각성현상’에 해당한다.

전문가들은 “이런 심리적 어려움을 극복하려면 현재 상황이 스트레스로 작용하고 있으며, 그로 말미암아 불안이나 슬픔 등의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부터 인정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이어 생존과 안전을 위한 현실적인 생활 속 대비책을 마련하고, 예행 연습을 하는 것이 심리적 안정에 도움이 된다고 강조한다.

김명찬 인제대 상담심리치료학과 교수는 “사람들은 불확실하거나 통제가 가능하지 않은 상황에서 불안과 공포를 느낀다”며 “통제 가능하다고 판단하면 진정하고 안정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즉, 지진을 느끼더라도 피할 수 없는 재앙으로만 인식하지 않고 통제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마인드를 지니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지진을 경험한 후 일상 생활이 제대로 이뤄지는지 잘 관찰하고 미비한 점을 보완하려고 노력하는 자세도 중요하다고 김 교수는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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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 kb@kyongbu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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