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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젊은 시절, 유독 색(色)을 많이 밝혔습니다. 오해 없으시기 바랍니다. 물론, 색(color)입니다. 옛날에는 에로티시즘 중독을 ‘색을 밝힌다’라고 표현했습니다. 색(color)과 색(sex)을 서로 가까이 있는 것으로 본 것이지요. 일찍 결혼해서 곁눈질 한 번 안 하고 꾸준하게 일부종사(一婦從事)에 매진하고 있는 저에게는 그런 비유가 문자 그대로 ‘죽은 비유’에 불과했습니다. 나이까지 들어 보니 한층 더 그렇습니다. 이제는 색(sex)은커녕 색(color)에서마저도 별반 흥이 일지 않습니다. 며칠 전 백화점 가판대에서 할인율을 높게 해서 파는 티셔츠 하나를 골랐습니다. 마음에 드는 약간 붉은 색 계통의 티셔츠가 있어서 하나 샀습니다. 그것과 함께 진노랑색 티셔츠도 하나 살까 하다가 그냥 왔습니다. 갑자기 눈에 훅 들어와서 한 번 입어봤는데 체형이 받쳐주질 않아서 포기했습니다. 그런 진노랑은 평생 처음입니다. 회색이 가미된 연노랑은 십여 년 전에 집사람이 사다 준 것이 하나 있습니다. 당시로는 제법 돈을 준 것인데 지금도 가끔씩 잘 입습니다.

젊을 때의 색 중독과 관련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색은 아무래도 진파랑일 것 같습니다. 아파트 거실 바닥을 한 치도 남김없이 그 색깔 카펫으로 도배했습니다. 무겁고 광채 나는 월넛 계통의 내장재와 붙박이 가구, 한쪽 벽면을 일렬로 장식한 바닥보다 조금 옅은 파란색의 소파, 그 맞은편의 피아노, 그리고 화려한 샹들리에 거실 등이 그 진파랑의 바닥 카펫과 어우러져서 무척 화려한 느낌을 주었습니다. 방문자들이 이구동성으로 그 ‘색감의 도발’을 상찬했습니다. 그 집 이후로 몇 번의 이사를 다녔지만, 평생 그 집만큼 색의 즐거움을 준 집은 없었습니다. 두 번째 색은 진빨강입니다. 그 무렵 차도 처음 샀는데 빨간색 프라이드였습니다. 앞문 두 짝만 있는 유럽형이라고 했습니다. 처음 산 자가용도 좋았지만 차 색깔이 특히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 뒤로도 여러 대 차를 바꾸었지만, 그때만큼의 감흥을 주는 차는 다시없었습니다. 보는 이마다 ‘남자의 색깔’은 아니지 않으냐고 토를 달았습니다. 나중의 한 직장 동료는 자기가 학교 다닐 때 학생 탤런트 강석우가 그런 차를 몰고 다녔다고 말해주기도 했습니다. “당신이 무슨 연예인이라도 되나요?”라고 묻는 어투였습니다. 남들이야 뭐라 하던 그때 제 삶에 대한 만족도가 꽤나 높았습니다. 늘 웃었고 매사에 자신감이 넘쳤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의 그런 ‘색 중독’이 병일 것 같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유미주의의 탈을 쓰고 있지만 내심 지독한 환부를 감추기 위한 속임수라는 것, 독한 인공 향수에 지나지 않는다는 자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효시도 생각이 났습니다. 어머니를 여의고 세상의 비참과 쓸쓸함을 속절없이 견뎌야 했던 중학생 시절, 어떤 아름다움과도 비견될 수 없는 절대미가 홀연히 제 눈 앞에 펼쳐진 적이 있었습니다. 교정(校庭)의 오래된 벚나무의 그 일사불란하고 거두절미한, 거의 폭거에 가까운, 장엄한 낙화 장면이었습니다. 난생처음 보는 장엄이었습니다. 산언덕에서 바다 쪽으로, 마치 떼 지어 행군하는 새때들처럼 일제히 바람을 타고 쏟아져 내리던 벚꽃들의 화려한 군무(群舞)에 저는 그만 혼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쓸쓸히 낡은 담에 기대어 묵묵히 남루한 세월을 견디며 서 있던 검은 고목들이었기에 더 감동적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어린 부랑아(浮浪兒)는 색 중독자가 된 것입니다. 그런 생각이 든 이후로는 아예 색을 멀리했습니다. 그저 못 본 척했습니다. 그래야 병을 깊게 하지 않을 것 같아서였습니다. 그렇게 수십 년 살았습니다. 그러다 며칠 전 다시 색을 봤습니다. “당신 진파랑 맞죠?”, 가판대에 누워있던 색 하나가 불쑥 일어나, 제게 그렇게 물어 왔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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