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운구 사진작가
흑백의 아름다운 질감으로 경주 남산에 산재한 불상 등 문화재를 촬영해 전시회를 갖고 사진집 ‘경주남산’을 출간한 강운구 작가의 사진집을 완성하기까지의 여정을 2회에 걸쳐 들어본다.



많은 시간이 흘러 흘러갔다. 그간 남산(南山)은 바뀌었고 나는 늙었다. 그렇지만 나에겐 삼십 년도 더 넘은 그때의 기억이, 바위에 새겨진 부처처럼, 각인돼 있다.

컬러사진으로 이미 발표된 ‘경주남산’ 떠올릴 때마다 그때 흑백 사진을 안 찍은 게 후회되곤 했다. 그러다 마침내 그것을 흑백 사진으로 재현할 기회가 왔다.

흑백 사진으로 변환될 때까지 ‘경주 남산’ 사진이 살아 있는 것은 그 찍힌 대상이 중요하고 아름답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한 것은 그저 요령 피워 얼버무리지 않고 똑바로(정공법) 대상에 접근한 것뿐이다.

‘경주 남산’은 나의 ‘역사 삼부작’2 중에서 가장 먼저인 1983년부터 한 작업이다.

‘경주 남산’이 ‘오래된 풍경’ 중에서는 가장 먼저 한 작업이다. 그땐 직장을 그만두고 프리랜서를 시작할 즈음이었다. 말이야 듣기 좋은 프리랜서이지, 사실은 한심한 실업자나 다르지 않았다. 언제 부탁이 들어올지도 모르는 일감을 기다리느니, 오래전부터 궁리하던 일을 하나하나 해 나갈 작정을 했다. 한 열흘쯤, 흙먼지 날리는 버스를 갈아타고 다니며 온 나라 산천과 눈 맞추고 착잡한 인사를 올렸다. 그리고 마침내 경주에 내려서 남산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몇 군데를 가 보니 스물 몇 해 전에 처음 보았던 때와 상태가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저물어 어둑해질 때까지 남산 숲 속을 서성댔다. 남들이 눈치채지 못하는 그런 출정의식을 혼자 치르고 난 한 달쯤 뒤부터 몇 년 동안 드문드문 경주를, 남산을 오가기 시작했다.

경주 남산은 바로 경주 시내에 닿아 있는 산이다. 주봉은 금오산(金鰲山, 해발 471m)이고, 동서가 12㎞, 남북이 8㎞인 야산이다. 그런데 이 만만해 보이는 산에 가 보면 뜻밖에도 골짜기는 깊고 능선은 가파르다. 그 많은 골짜기와 능선들에는 신라 천 년 동안 있었던 수를 알 수 없는(어떤 학자는 쉰 몇 곳이었을 것으로, 다른 학자는 100곳이 넘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절터와 여러 탑과, 육십 체(體)쯤의 석불이 있다. 거기는, 탑들은 쓰러져 있고 불상들은 머리가 떨어져 나간 것들이 대부분인 신라 때의 폐허이다.

1987년에 나는 “…신라 천 년 동안 이룩했던 성지(聖地)가 신라가 망한 이후 지금까지 천 년 동안 폐허화 돼 왔다. 폐허가 폐허 그대로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은 이곳 말고는 따로 없다”라고 썼었다. 그곳은 지나간 천 년간보다 최근의 몇 년 동안 더 많이 변했다.

물론 돌부처들은 다 종교적 아이콘이고 신앙의 대상이지만, 나에게는 한국조각의 원형인 미술품이다. 그것들은 저 먼 선사시대 암각화의 계보를 잇고 있다. 세련된 솜씨를 가진 뛰어난 명장(名匠)이 새기거나 만든 불상도 있고, 서툰 보통 사람이 그저 정성 하나만 가지고 새기거나 만든 것으로 짐작되는 것들도 있다. 그리고 새기거나 만든 시대도, 신라 때 것이 아닌 것으로 보이는 것들도 있다. 그런 것 중에는 양식화한 부처보다는 보통 사람 얼굴을 새긴 것들도 있다. 여기저기에 있는 ‘승상(僧像)’들도 보통 얼굴들인데, 아마 스스로를 새긴 자화상일 것이다. 이런 조각도 주의 깊게 관찰했다. 서투르나 지극한 정성을 기울인 표가 많이 나는 것들에서 나는 더 조각의 본질을 느꼈다. 요령이나 경험이 없는 ―경험이 많다 하더라도 서양의 대리석과는 달리 한국의 화강암은 강도가 강해서 정교하게 하기가 아주 어렵다― 보통 사람들이 음각으로(또는 음각과 양각을 섞어서) 서투르게 새긴 것들은 지극한 신앙심이었거나, 아니면 표현 욕구였을 것이다. 경험 많은 장인이 했거나 솜씨 없는 보통 사람이 했거나 간에, 천 몇백 년 전 막 새겼을 때보다는 확실히 지금이 더 아름다울 것이다. 천 년 세월의 비와 바람이 화강암의 막 드러나 허옇던 빛깔을 가라앉히고 거칠던 피부를 부드럽게 해서 그렇다.


곽성일 기자
곽성일 기자 kwak@kyongbuk.com

행정사회부 데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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