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둔유=동어=황해도 황주' 해석 제각각

▲ 둔유

낙랑군에 늘 붙어 다니는 지역이 있는데, 바로 대방군이다. “한서(漢書)”에 등장하는 한사군은 낙랑, 현도, 임둔, 진번이다. 그런데 “신당서” ‘배구전’의 주석에는 현도, 낙랑, 대방의 삼군(三郡)을 설치한 것으로 기록되어 일연선사도 역사적 기록이 왜 서로 어긋나는지 의심하였다. 삼국유사는 낙랑에 이어 대방을 다음과 같이 남북으로 나누어 기록하고 있다.

‘북대방(北帶方)’은 본래 죽담성(竹覃城)이다. 신라 노례왕 4년(AD 27년)에 대방 사람들이 낙랑 사람들과 함께 신라에 항복해 왔다.

일연 주 : 이것은 모두 전한(前漢)이 두었던 두 군(郡)의 이름으로 그 후 참람스럽게 나라로 일컫다가 이때에 항복해 왔다.

조위(曹魏) 때 비로소 남대방군(南帶方郡: 지금의 남원부)을 두었으므로 ‘남대방’이라 하였다. 대방의 남쪽은 바닷물이 천 리(千里)나 되어 한해(澣海)라고 했다.

일연 주 : 후한(後漢) 건안(建安) 연간에 마한 남쪽의 황무지를 대방군으로 삼았다. 왜(倭)와 한(漢)이 드디어 여기에 속했다는 것이 바로 이 말이다.

삼국유사의 이 대목은 난해하여 면밀한 분석이 필요하다. 우선 북대방과 남대방의 구별은 일연선사의 독특한 설명이다. 그는 여러 책에 등장하는 대방이 일정하지 아니함을 인식하여 이처럼 분류한 것 같다. 그러나 대방에 관한 정확한 정보가 미흡한 상황에서 정리한 것으로 사료되므로 현대적 관점에서 다시 규명할 필요가 있다. 먼저 북대방은 전한의 무제가 낙랑과 함께 설치한 것으로 보며 나중에 낙랑국과 같이 대방국으로 자칭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학계는 죽담성(竹覃城)을 죽군성(竹軍城)의 오기(誤記)로 보고 죽군성의 위치를 전남나주 부근으로 비정하는데, 근거를 “삼국사기” 권37‘삼국유명미상지분조(三國有名未詳地分條)’의 “대방주는 본래 죽군성인데 여섯 현이 있다(帶方州 本竹軍城 六縣).”는 기록에 둔다. 대방주는 당이 백제를 멸한 후, 백제 지역에 설치하려한 웅진도독부 산하 일곱 주(州)의 하나이므로 당나라 시대의 일인데, 일연이 한나라의 대방군으로 오인한 것으로 이해한다.

다음 남대방은 삼국지의 시대배경으로 유명한, 후한 헌제의 건안시대에, 요동의 공손씨가 204년 설치한 대방군을 말하는데, 일연선사는 이를 남대방이라 하며 한(韓)과 왜(倭)가 여기 속하였다고 한다. “삼국지 위서(魏書)” ‘오환선비동이전’에 “후한 환제,영제 때에 한과 예가 강성하여 통제할 수 없자 백성들이 한국(韓國)으로 많이 들어갔다. 건안 연간에 공손강이 둔유현(屯有縣) 이남에 대방군을 설치하고... 한예(韓濊)를 토벌하였다... 이후 왜한(倭漢)은 대방군에 속하게 되었다.”라는 기록을, 일연이 둔유현 대신에 마한으로 고쳐 인용한 것이다. 여기서 한과 예, 왜와 한의 갑작스런 등장은 우리 고대사의 또 하나의 수수께끼다.

그러면 둔유현이 어디인가 찾아내면 대방의 위치가 드러난다. 이병도 박사는 둔유를 황해도 황주(黃州)로 비정하였다. “고려사 지리지”에 의하면, 황주는 고구려 때 ‘동홀’ 또는 ‘우동어홀’인데, 우동어홀에서 우와 홀을 뗀 ‘동어’가 둔유와 음이 비슷하다는 것이 이유다. 과학적 근거가 궁색한 것 같다. 오히려?“후한서 동이열전”에는, “질제, 환제 연간(146~167)에 고구려가 요동 서안평을 공격해 대방령을 죽이고 낙랑태수의 처자를 사로잡았다.”라든가 “군국지에 서안평현과 대방현은 모두 요동군에 속해 있다(西安平 帶方縣 ?屬遼東郡).”고 요동으로 고백하고 있으며 현 중국지도에는 산서성 장치시에 둔유(屯留)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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