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경주 남천변 김유신 장군의 종택이 있던 곳으로 알려진 재매정터에서 돌로 만든 빙고(氷庫)가 발굴돼 이야깃거리였다. 재매정터에는 왕궁인 월성 서쪽에 옛 우물터가 남아있는 곳으로 1872년에 세워진 비각이 있다. 남쪽 하천가에 만들어진 김유신가의 빙고는 내부 중앙의 물이 빠지게 ‘열십자(十)’자형의 시설이 바깥 배수로와 연결돼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빙고가 있었던 것으로 밝혀진 이 터는 신라 전성시대 화려하기로 소문난 귀족의 집들인 35 금입택 중 유일하게 그 흔적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장군 가문의 명칭인‘재매’를 부쳐 ‘재매정’이라는 종가 집 우물로 전해온다. 김유신이 화랑이 되고, 상장군, 나당연합군 대총관 등으로 일생의 황금기를 살며 마셨을 그 우물터다. 깊이 5.7m, 원형지름 1.8m 정도 된다.

김유신은 선덕여왕 13년(644)에 백제의 일곱 성을 공격한 후 이듬해 정월에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백제의 역습으로 김유신은 집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말 위에서 발길을 돌려야 했다. 부하를 시켜 집에서 떠온 물을 마신 김유신은 “우리 집 물맛은 옛날 그대로구나” 하고 다시 전쟁터로 나갔다.

이 김유신의 옛 집터인 재매정터에서 이번에는 통일신라시대 비늘갑옷(찰갑 札甲)이 출토됐다고 신라문화유산연구원이 12일 발굴 보고서를 통해 밝혔다. 통일신라시대 갑옷은 경주 동궁 월지에서 출토된 청동소찰(갑옷에 다는 비늘모양의 가죽이나 쇳조각)을 제외하고는 이것이 처음이다. 비늘갑옷은 길이 5~10㎝, 너비 2~3㎝ 내외의 철판 700여 매로 만들어져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아쉬운 점은 이 갑옷이 김유신 장군의 갑옷이 아닐 것이라는 점이다. 갑옷이 재매정터 아래의 인위적으로 판 구덩이에서 출토된 점과 같이 출토된 토기가 10세기경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595년부터 673년까지 생존했던 김유신의 것으로는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또한 비교적 크기가 작고 비늘을 이루는 소찰의 규격이 불규칙해서 높은 신분의 장군이 사용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경주시가 재매정터의 발굴과 복원으로 관광 자원화 할 계획인데 이곳에서 김유신장군의 화려한 비늘 갑옷이 발굴 됐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상상해 봤다.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