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개·지조 '병자호란 척화신'…나라 빼앗긴 울분 서려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이 하 수상하니 올동말동하여라.

청음(淸陰) 김상헌(1570~1652)은 병자호란 때 척화를 주장한 대표적 절개의 인물이다. 그는 청나라와 항복의 화의가 성립되자, 임금 앞에서 항복의 국서를 찢어버리고 자결하려 했으나 뜻을 못 이루고 고향인 안동 풍산읍 소산리 ‘청원루’에 내려와 은거했다. 이 시조는 이 사건으로 청나라로 압송돼 가던 중, 서울을 지나면서 읊은 우국충절의 시조다.

김상헌은 안동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이황의 문인이었던 윤근수에게 수학했다. 타고난 성품이 강직하여 한번 품은 뜻은 굽힐 줄을 몰랐다. 과거에 급제하고 관직에 나가서도 출사와 파직을 반복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김상헌의 본관은 안동, 자는 숙도(叔度), 호는 청음이다. 아버지는 돈녕부도정 김극효이고, 형은 우의정 김상용이다. 어린 시절 이황의 문인이었던 윤근수(尹根壽)에게서 수학했다. 1596년(선조29) 정시문과에 급제한 뒤 대제학을 거쳐 육조의 판서를 두루 역임했다.

병자호란 때 끝까지 싸워야 한다고 주장하다 인조가 청에 항복하자 파직됐다. 1639년(인조17) 삼전도비를 부쉈다는 혐의를 받고 청나라에 압송되었다가 6년 만에 풀려났으며, 귀국 후 좌의정에 올랐다. 사후에 서인 정권이 유지되면서 절개를 지킨 대로(大老)로 추앙받았다.

마을 입구 언덕에 있는 삼귀정


△ 풍산 소산리, 청백과 절개의 고장

소산리(素山里)는 안동 풍산읍에서 하회로 가는 길목에 있는 마을이다.

마을 한복판에 있는 청원루(淸遠樓)는 청음이 선양에서 돌아와 풀려난 뒤 중건한 누각이다.‘청나라를 멀리 한다’는 뜻으로 붙인 이름이다. 원래 2채의 건물로 41칸이었으나 현재 앞면 7칸짜리의 건물만 남아 있다. 청원루는 기단을 높게 한 단층 다락집 형태로 대청을 중앙에 두고 양쪽에 온돌방이 있는 형식의 건물이다.

소산리에는 김방경과 김선평의 후예인 두 안동 김씨가 살고 있다. 이른바 ‘선김(先金)’ 혹은 ‘구김’으로 불리는 이들과 ‘후김(後金)’,‘신김’으로 불리는 이들이 살고 있다.

김방경은 대몽항쟁의 주력인 삼별초를 진압하고 원의 일본정벌 때 고려군을 이끌고 출정했던 무장이다. 그는 신라 경순왕의 후예인 경주 김씨 계열의 안동 김씨의 중시조다. 조선 전기에 큰 세를 떨치던 이들 ‘구 안동 김씨’는 인조 때 영의정 김자점이 역모죄로 처형되면서 그 세가 꺾이게 됐다. 인물로는 임진왜란 때 김시민, 숙종 때의 시인 김득신, 독립운동가 백범(白凡) 등이 있다.

‘후김’(신김)으로 불리는 이들이, 왕건을 도와 ‘안동의 3태사’로 불리는 김선평을 시조로 하는 또 다른 안동 김씨다. ‘청원루의 자손’으로 불리는 장동김씨는 ‘금관자 서 말이 나온 집안’이란 말이 나올 정도로 인물을 많이 배출했다.

특히 청음 자손들이 두드러져 부자 영의정, 형제 영의정, 부자 대제학, 15명의 정승과 51명의 판서를 배출해 조선후기 60년 세도정치를 이끈 주역이었다.

원래 이 마을 이름은 금산촌(金山村)이었다. 청음은 마을이름이 사치스런 느낌이 든다고 검박한 느낌의 소산리로 바꾸었다.



△ 청나라도 인정한 절개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에 항복한 후 김상헌은 안동으로 내려가 학가산 아래 칩거했다. 1639년(인조17) 청나라가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출병을 요구해 오자 김상헌은 반대 상소를 올렸다.

“근래 또 떠도는 소문을 듣건대 조정에서 북사(北使)의 말에 따라 장차 5천명의 군병을 징발해 심양을 도와 대명(大明)을 침범한다고 합니다. … 예로부터 죽지 않는 사람이 없고 망하지 않는 나라가 없는데, 죽고 망하는 것은 참을 수 있어도 반역을 따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전하께 어떤 사람이 ‘원수를 도와 제 부모를 친 사람이 있다’고 아뢴다면, 전하께서는 반드시 유사(有司)에게 다스리도록 명하실 것이며, 그 사람이 아무리 좋은 말로 자신을 해명한다 할지라도 전하께서는 반드시 왕법(王法)을 시행하실 것이니, 이것은 천하의 공통된 도리입니다.“

인조실록에 실린 내용이다. 싸우다가 안 되면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리고, 나라가 망하더라도 명의를 지켜야 나라를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이 요지였다.

청음 김상헌의 올곧은 성품 앞에서는 누구도 그의 확고한 소신을 꺾을 수 없었다. 청 태조의 칙서까지도 옳지 않다 하여 찢어버린 그의 위풍 앞에서는 누구도 감히 대항할 수 없었다. 이처럼 청음선생은 올곧은 성격 탓에 이른바 속유(俗儒)들은 언감생심 그 옆에 다가가기 조차 주저했었다.

비록 당시의 정국은 어지러웠지만 그처럼 신념이 굳고 나라 위한 일이라면 언제든지 목숨을 버릴 준비를 하고 있는 선비다운 각료였다. 우리나라 관료계의 작금의 현실을 감안할 때 청음의 관료상은 더욱 우러러보인다.

서미리 목석거


△ 해동의 수양산 서미리

안동시 풍산읍 서미리는 서애 류성룡이 말년을 보낸 3칸짜리 초가집 농환재가 있는 마을이다. 학가산 자락의 이 마을은 중대바위 아래 산골짜기 작은 마을이다. 서애와 청음 선생이 말년을 보낸 곳이다.

청음 김상헌은 병자호란의 굴욕을 분개하며 고향 소산으로 물러나 청원루에 은거하다가 이 곳 서미리로 거처를 옮겨 두어 칸 초가를 짓고 ‘목석거만석산방(木石居萬石山房)’이라 이름 짓고 오랑캐에게 나라를 빼앗긴 울분을 달랬던 곳이다.

이 때 선생은 옛날 백이숙제가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를 치려는 것을 말려도 듣지 않자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먹고 살았던 것에 자신의 처지를 비겨서 서미의 아름다울 ‘미(美)’자를 고사리 ‘미(薇)’자로 바꾸어 서미(西薇)로 지금까지 불리고 있다.

지금도 이 곳엔 서애, 청음 두 선생에 얽힌 유적이 많다. ‘해동의 수양산’이라 불린 이곳에는 청음의 ‘목석거’는 남아 있지 않다. 대신 후대에 세운 ‘청음선생 목석거 유허비’가 남았는데 이 비석은 ‘빗집바위’라는 커다란 바위 위의 비각 속에 모셔지고 있다. 바위 상단 중앙에는 ‘목석거’ 세 글자가 새겨져 있다.

바위 아래에 서간사(西磵祠)는 청음 사후, 후인들이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정조가 사호를 ‘서간’이라고 내려 주었다고 한다. 서간사는 순조 때 사액됐으나 고종 7년(1870)에 이르러 대원군의 훼철령에 따라 철거됐다. 지금 그 자리에 남은 것은 후학들이 세운 강린당이 남아 있다.

안동 풍산읍 소산리 청원루
청원루 현판
청원루 앞 시비



오종명 기자
오종명 기자 ojm2171@kyongbuk.com

안동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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